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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세라 현장탐방

[성공회] 유토피아는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 함께 만들어 가는 것 - 성공회 라파엘 신부 인터뷰

by pnuquesera 2026. 6. 3.

작성자: 비타  

 
 
* 일러두기: 인터뷰에서 말한 모든 이야기는 대한성공회 부산교구의 공식 입장이 아닌 성직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성공회는 기독교 교단 중의 하나로 16세기 잉글랜드의 개신교 종교개혁에서 기원한다. 성공회를 진보적인 교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2023년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동성 커플을 위한 사제의 축복기도를 공식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했고, 2025년 11월 웨일스 성공회에서는 최초로 레즈비언임을 공개 선언한 체리 밴 주교가 대주교가 선출되었다.[각주:1] 그리고 올해 2026년 3월, 세런던의 주교였던 사라 멀랄리가 세계 성공회의 대표인 캔터베리 대주교로 승좌하면서 역사상 최초의 여성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각주:2]한국에서는 용산 나눔의집과 길찾는 교회가 성소수자 친화적인 사회운동을 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오늘은 대한성공회 부산교구의 동래교회 황윤하 라파엘 신부를 만나 성공회에 대한 질문과 한국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시: 2026.06.02 (화) 10:30 ~ 12:00
장소: 성공회 부산 동래교회
만난 사람

🟡 황윤하 라파엘 신부

목차

1. 들어가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교회, 성공회
2.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먹고 한 몸을 이룬다는 것.
3. 무엇을 위하여 종교는 존재하는가
4. 성소수자와 교회: 결혼은 모두에게 소중하죠.
5. 나가며: 중요한 건 일상을 지켜내는 일

 

사진 출처: 성공회 동래교회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DX1MzslkSgO/?igsh=c28zaHFkNHh4Ymtm

1. 들어가며: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교회, 성공회

비타       안녕하세요, 신부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라파엘    대한성공회 부산교구에 소속되어 있는 황윤하 라파엘 신부입니다. 사제가 된 건 2024년, 이제 겨우 2년이 지난 새삥이구요. (웃음) 신학대학원은 2017년 2월에 졸업하고, 그다음 2018년에 부제 서품을 받았고요. 부제로도 한 2년 정도 사목을 하다가 이제 그만두고 나가서 사회 물을 좀 먹었고요. 회사도 다니고 책 만드는 것도 좀 배우는 기간이 있었지만 제가 있어야 할 곳은 교회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산으로 오면서 복직을 한 케이스입니다.
비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 성공회를 모르시는 분들이 되게 많을 것 같아요. 만약 들어보신 분들이 있다면 2026년에는 최초의 여성 캔터베리 대주교승좌라는 역사적인 사건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성공회에 대한 이미지는 교회 중에서는 진보적이거나 성소수자 친화적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성공회가 어떤 곳인지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파엘    성공회가 뭐냐는 질문은 아주 범위가 큰 질문이라 제가 느끼는 성공회가 뭔지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관점[각주:3]인 것 같고, 저도 거기에는 동의를 하고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개신교회가 아닌 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개신교회이고,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서 아주 초창기에 태어난 개신교회로서, 좀 독특한 신학과 제도를 발전시켜 온 교회라고 일단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편집자 주]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해 세운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가 성공회의 출발점이다. 이후 대영제국의 식민지 확장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 현재 165개국, 8,500만 명의 신자를 가진 세계 세 번째 기독교 교파가 되었다. 한국에는 1890년 선교를 통해 들어왔다.

 
라파엘    그래서 저는 성공회를 다양성의 교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좀 독특한 점은, 그 다양성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차이로 인해서 분리하지 않는 교회인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든 같이 있으려고 노력하는 특징이 있는 교회이다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고요. 그래서 회의에서 뭔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꽤 오랜 시간이 걸려요. 숙고를 오래 하고, 여러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고, 이제 이런 과정들이 있는 교회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고요.  전 외국 성공회를 많이 경험해 보진 못했지만, 성공회들을 묶는 비슷한 것들이 있다면 아주 뜨겁지 않다. 그런데 또 아주 차갑지도 않은그래서 사람들이 약간, 소위 말하면 좀 젠틀해요. 많은 것들을 요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심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적절한 거리를 잘 유지하려고 하신다고 봐야 될까요. 저는 좀 그렇게 느꼈어요.
비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 어떻게 보면 대도시의 특징 같은데요. 서울을 '차씹도'라고 하잖아요. (편집자주—차가운 씹새끼들의 도시) 도시는 개인의 익명성을 보장하되, 또 그것이 내 이웃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이어질 수 있어서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신부님께서 말한 '차가우면서 뜨겁지도 않다, 젠틀하다'라는 게 서로의 자리를 보존하고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 쪽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쪽에서는 무관심의 한 양태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라파엘    딱 말씀하신 그 상태예요. 무관심과 거리, 안전한 거리감 사이 어딘가에 이렇게 떠다니고 있는 느낌이 좀 있어요. 예를 들면 성공회에 찾아오시는 분들은 이미 이 교회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좀 알고 와요. 나무위키 이런 거 열심히 찾아보고 오시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오면 너무 좋다고 해요. 대체로 다른 교회에서부터, 특히 개신교회에서 전입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개신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열정—조금 과하게 데워지는 열정—때문에 지쳐서 오시는 분들은 이 성공회와 굉장히 허니문 기간을 좋게 보내십니다. 너무 좋다고 막 그래요. 그런데 사실은 그런 분들 중에서 떠나시는 분들이 꽤 있어요.
라파엘    이제 교회를 떠난다고 해도 그 사람하고 [인]연이 단절되는 건 아니니까, 이제 그분들한테—교회의 어떤 부분 때문에 다른 교회로 옮기셨냐, 아니면 어떤 부분 때문에 신앙생활을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셨냐—이런 걸 물어봤을 때, 처음에는 다가오지 않는 게 너무 자유로웠는데, 나중에는 너무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외로워졌다고, 이런 표현들을 좀 하시더라고요. 저는 이제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좀 반성하기도 했고, 우리가 너무 '젠틀함'이라는 그것을 무기 삼아서 교회로서 해야 되는 것들을 좀 등한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좀 하면서, 최대한 저는—적어도 이 동래교회 안에서는—안전한 거리감과 엮여 있는 연대감을 동시에 만드는 방법에 대한 고민들을 좀 하고 있습니다.


 

2.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먹고 한 몸을 이룬다는 것.

비타       신부님께서는 다른 교회를 간다는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성공회에 가야겠다고 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라파엘    저희 집안은 대대로 [개신교회] 장로교 집안이었어서, 장로교인으로 나고 자랐고 그렇게 오래 교육을 받았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도 개신교회가 싫다고 말하진 않아요. 그게 제 과거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예배에 대한 궁금증이 좀 생겼던 것 같아요. 청년 시절에, 소위 말하는 '경배와 찬양' 방식—앞에서 악기와 싱어들이 함께 공연처럼 보여지는 그런 것들, 그리고 감정을 고양하는 노래, 이런 것들이 너무 익숙해진 예배 환경—에서 저는 뭔가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게 우리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분명히 의미가 있는데, 항상 그것만이 의미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통적인 예배가 궁금해졌어요.
라파엘    그렇게 전통적인 예배를 찾아보자는 생각에서 성공회를 가보자고 결정했고, 공교롭게도 집이랑 더 가까운 게 성공회라 성공회 교회를 무작정 갔어요. 평일날 예배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거기서 제가 처음으로 예배—'감사성찬례'라고 부르는데—를 드리면서, "이게 예배라는 것의 의미구나."라는 걸 경험했어요.
 

[편집자 주] 감사성찬례(Eucharist): 성공회의 주된 예배 형식. 성서 말씀을 듣고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는 의식이 중심을 이룬다. 가톨릭의 미사, 개신교의 예배와 같은 개념이지만, 성공회는 이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뜻에서 감사성찬례라 부른다.

 
라파엘    성공회 예배의 특징은 항상 빵과 포도주—우리는 성체와 보혈이라고 부르는 빵과 포도주를 나눈다는 건데—빵을 딱 쪼개 보여주면서,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이렇게 말한 다음에 빵을 서로 다 나눠 먹는단 말이에요. 저는 그 말이 "이게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구나, 우리가 다 각자의 모습으로 와 있지만 한 빵을 먹음으로써 우리가 한 몸이 된다는 걸 계속 기억하게 만드는 게 예배의 힘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예배가 끝나고 교회에 계셨던 부제님한테 "저 성공회 신자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바로 성공회 신자가 됐어요. 그리고 그게 쭉 이어져서 지금까지 왔네요.
비타       다른 교회는 안 가보셨나요? 
라파엘    "아, 여기에서 내가 예배라는 것의 의미를 찾았다"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성공회에 정착하게 된 것이 만족스럽고, 그 사이에 신학적인 생각의 변화도 있었어요. 신학이라는 것들을 접하게 되면서 다양성에 대한 고민도 해보게 되고, 하느님의 존재와 이 창조 세계와의 관계 이런 것도 고민해 보게 되고 생각하는 폭이 넓어졌다고 해야 될까요? 그게 제가 성공회로 와서 경험하고 얻게 된 선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타       성공회로 오고 난 뒤에 신부님의 인식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되는 구체적인 경험이 있으실까요? 
라파엘    제가 성공회 신자가 되는 무렵에 맞물린 경험들이 있어요. 그게 한 2011년 정도였는데, 그때 한창 트위터를 열심히 하던 시절이에요.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들이 좀 생겼는데요. 그 사람들 중에서 교회와 연결된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교회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좀 지켜보고 교류를 하다 보니—그 사람들 중에 몇몇이 성공회 신자거나 감리교 신자기도 했어요—이제 친구 집단들을 경험하면서 생각이 바뀌었고, 제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다녔던 학교도 소위 말하는 진보적인 학풍을 가진 곳이었기에 내가 그동안 있었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는 것들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아요.
라파엘    그때부터 이제 성소수자 인권이라든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성소수자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무슨 고민을 하고 사는지, 이 고민이 나의 고민과는 어떻게 다르고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지, 이런 것들을 친구로서 부딪혀가면서 좀 배웠던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싸우기도 했어요. "너 왜 이렇게 예민해" 이런 말들을 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은 "아, 이게 그렇게 예민할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걸 이해하는 순간도 있었고요. 화해도 해보고 부딪히기도 한 기간이 있었어요. 
비타       신앙이라는 바탕을 중심으로 친구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법을  대화할 수 있다는 건 멋진 경험이네요.
라파엘    저는 그거 하나는 확실하게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와 네가 뭐가 다를까를 일단 궁금해했고요. 그리고 "우리가 인간인데"라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대화를 해보려고 엄청 시도했어요. 단순히 호기심으로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친구로서 이제 어떻게 하고 뭐 하고 사는지 궁금했고, 얘기를 하다 보니까 친구가 저와 서 있는 사회적 환경 자체가 너무 달랐을 때—저는 남자인 데다가 이성애자이고, 어디서든 주로 주류에 계속 가게 되는 입장에 있는데, 그게 아닌 친구들이 있었던 거죠. 처음에는 그런 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까 묘하게 이렇게 갈림길들이 생기더라고요. 그 갈림길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래서 친구들하고 진짜 오래 얘기도 해보고, 싸우기도 하고 절교도 했다가, 내가 미안하다 이렇게 해서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이제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지금의 이해를 좀 하게 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좀 하게 됐네요.
비타       친구들도 대단하네요.
라파엘    저는 친구들이 제게 고개를 돌리면 찾아가는 타입이었어요. 제가 뭔가를 얘기했는데 친구들이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그때 저는 미안하다고 하고, 내가 더 배우겠다고 하고, 찾아가서 밥도 먹고 수다도 떨면서. 너무 낯간지러운 표현이지만 저는 그 사람들이 너무 소중했고, 친구로서 계속 있는 게 저에게 너무 즐거운 일이었거든요. 이 친구가 잘 살았으면 좋겠고, 내가 이 친구의 삶과 뭔가 같이 늙어가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고, 이런 생각들을 좀 해서, 이것들을 그 당시에는 굉장히 많이 신경을 썼던 것 같아요.
비타       그 지점은 감동적이면서도 동시에 쉽지 않은 지점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친구와 싸운다거나 할 때, 너무 나 자신을 책망할 때도 있고, 아니면 왜 이렇게 예민해? 하고 서서히 멀어질 수 있는데, 나에 대한 상처가 있을 수 있고, 상대에게 갖고 있는 원망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을 상처를 감내하면서도 꾸준히 만나는 관계가 이른바 심리학에서는 건강한 자아라고 하기도 하죠. 그런 분이 있다는 것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라파엘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어요. 어떤 한 친구가 있는데, 사실은 저보다 나이가 많아요. 형이에요, 형. 근데 이분이 처음에 저희 집단과 관계를 맺을 때, 자기는 나이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 모두와 말을 놓고 지낸다고 말을 시작했어요. "아, 그렇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저도 그냥 이제 이름을 부르고 했는데, 제가 너무 마음이 불편한 거예요. 아니, 이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고 그래도 경험이 쌓인 사람으로서 내가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래서 존댓말을 쓰는 거와는 관계없이, 그래도 적어도 호칭을 나는 '형'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런 걸 엄청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거든요.
라파엘    그래서 어느 날은 제가 불러다가 밥 먹으면서 그런 얘기를 했죠. "나는 당신을 형이라고 부르는 게 내 마음이 편하다, 반말은 할 거지만 형은 형이고, 이게 나의 존중의 표현인데 그냥 받으라고." 그랬더니 살짝 고민하더니 "그래, 그럼"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형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 형은 동시에 되게 예민한 사람이었어요. 형하고 대화를 하면서 "왜 이렇게 그냥 좀 넘어갈 건 넘어가자" 이런 것도 있었는데, 나중에 그 형한테 "형, 내가 오해한 게 있다. 내가 너무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다 보니, 이런 걸 왜 못 넘기지라는 것이 되게 구조적 문제였을 건데, 내가 이걸 너무 형의 개인 문제로 환원시켜서 이해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미안하다"고 얘기했더니, 괜찮다고 그런 부분들을 받아주기도 했고. 그래서 저도 제가 불편한 걸 막 얘기해서 쏟아낼 수 있었고, 그 형도 제게 그런 걸 얘기할 수 있었고. 근데 그런 친구들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제 그런 소위 요즘 말하는 이 감수성을 조금 배우게 된 것 같아요.
비타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저는 이게 역사적인 변화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2010년대 중반 전까지는, 보통 이렇게 서로 다른 위치에서 대화를 하고도 손절 안 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폭로 정치가 주류화 되기 이전인 것 같아요. 제 말은 미투 운동의 여파로 인해서 더는 진지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미투라는 역사적 사건을 맞이하고 난 이후부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가 흩어지고, 사적인 것이라고 소홀했던 많은 문제들이 밖으로 나왔다는 점에서 밝은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들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자기 검열이 내면화가 되었다고 할까요? 또, 극단주의가 기세를 부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아요.
라파엘    저도 그 말씀하신 거에 엄청 동의하는 건, 옛날에는 싸워도 괜찮았어요. 그러니까 의견이 달라도 "쟤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라는 것들은 약간 그냥 가지고 있는 기본 신뢰였던 것 같아요. 근데 이제는 인간의 신뢰를 보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의 사상이 신뢰의 유무를 결정하는—그러니까 같은 의견을 가지고 가다가도 어떤 새로운 지점에서 다른 의견을 표출했을 때, 지금까지 해왔던 그 같은 과정과 같은 인간으로서 공유했던 인간이라는 그 기본을 그냥 딱 잘라버려서, 상종 못할 사람—그러니까 사실은 인간을 존재로 보는 게 아니라 이제는 이념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좀 안타깝기도 하고. 한 10년 전에는 이게 낭만의 시대였는데, 지금은 그런 낭만도 없어졌나, 그런 생각도 좀 많이 들기도 하고.
비타       폭로 정치를 목격하면서 정치적 의견이나 도덕적 판단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공포감, 두려움을 갖게 된 지점도 있어요. 저는 과거가 마냥 좋기만 했던 낭만의 시대라고 생각하진 않기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러면 우리가 지금 현재 진솔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요구되는지 고민하고 있어요.


3. 무엇을 위하여 종교는 존재하는가 

비타       이제 종교에 대해 얘기를 나눠볼까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가게 된 계기는 아마도 세습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많을 것 같고, 지인에게 전도를 받아서 교회를 가게 된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부모님께서 교회를 다녔기에 청소년 시절까지 교회에 출석했지만, 거기서 많이 싸웠고요. (웃음) 교회에서는 저라는 존재가 OO의 자식으로 쉽게 환원되기에 답답한 지점이 많았어요. 그리고 저는 관성적으로 교회에 가는 게 싫어서 '내가 왜 교회에 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찾지 못해서 서서히 가지 않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가부터 대화를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요.
라파엘    종교의 역할이란 개인에게 있어서는 어떤 리추얼(ritual, 의식)을 제공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비타가] 관성적으로 교회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꾸준히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 삶의 복잡함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저는 생각해요. 일요일이 됐을 때 이 시간엔 내가 교회에 가는 행위가 삶의 기준 하나를 세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교회가 아니어도 사실 상관이 없지만, 혼란한 세상의 기준점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으로서의 기능이 종교가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고요.
라파엘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 안전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본드 같은 게 아닐까요? 인간이 너무 딱 붙어 있으면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근데 [종교가] 그 사이에 어떤 틈인 거죠. 틈을 메꿔주는 접착제 같은 역할, 조금 유연성 있는 접착제로서의 역할이 교회가 아닐까. 아까 우리가 얘기했던 것과 연결되는데, 인간을 이념으로만 보기 시작하면 딱 잘라내야 되는 상황이 자꾸 오는데, 그러면 결국에는 사람을 잘라야 되거든요. 종교는 사람에게 상처를 낸다기보다 완충지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라파엘    교회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모여서 같이 뭔가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곳. 제가 그런 표현 되게 자주 하는데, "우리 교회는 국민의힘 지지자도 민주당 지지자도 녹색당 지지자도 다 같이 와서 밥 먹고 빵 나눠 먹는다" 이게 교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되게 독특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급진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소수자와 호모포비아도 같이 이 자리에 모여 있을 수 있고,  같은 곳에 모여서 서로에 대한 비난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을 지향하며 걸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게 저는 종교가 가진 기능인 것 같아요.
 
비타       신부님 말씀에 일부는 동의하지만 일부 첨언하고 싶은 지점들이 있습니다. 교실이든 회사든 어딜 가든 호모포비아가 있고 성소수자들도 있는데, 그것도 일종의 섞임이죠. 하지만 거기서 누가 더 취약한 환경에 놓여있는가, 누가 더 차별을 경험하는가 했을 때 주로 소수자가 많이 겪잖아요. 신부님이 말하신 '같이 있음'은 단순히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의 뉘앙스가 있을 것 같고, 서로 다른 생각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인정하고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말하고 존중받음" 그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라파엘    다른 종교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 전제는 무조건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비타       사랑이 무섭잖아요. 왜냐하면 퀴어 퍼레이드 가면 차별세력이 "레알 러브(Real Love)"라는 슬로건을 쓰거든요.
라파엘    근데 저는 그래서 어떤 사랑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건데. 그것도 결국에는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의 사랑으로 다 끝나요.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은 그런 조건들이 붙지 않아요. 그러니까 뭐가 바른 모습이다라는 것들을 붙이지 않는, 진짜 완전히 상대의 전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거든요.
라파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기준은, "사랑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을 사랑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해요. "그건 악인들도 한다"이렇게 말하거든요. 되게 무서운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했을 때 이 정도까지는 사랑이고 이게 내가 말하는 사랑이야라고 얘기한다면, 그걸 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성소수자와 호모포비아가 만났을 때 이게 "진짜 사랑"이라는 식으로 얘기하잖아요. 돌아와야 된다고. 그건 그냥 자기네 방법으로 이걸 끌어들이는 것뿐이죠.
라파엘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펼쳐져 나간다는 걸 인정하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거죠. 근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또  부가적인 문제들이 생겨요. 이게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성에 초점을 맞췄을 때, 뭔가 무분별한 성관계 이런 것들에 대해서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되게 명확하게 이야기하거든요. "상호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성관계는 사실은 위험하고, 그냥 쾌락을 좇는 일이 돼버릴 뿐이야"라는 건, 강력하게 전달해요. 이건 성적 지향과는 아무 관계가 없거든요.
라파엘    그런 것들이 제가 말하는 이 사랑이라는 건 엄청난 거라서, 저도 잘 못하는 거죠. 저도 그냥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그런 걸 하기 위해서 적어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그게 저는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비타       사랑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라 모두가 설명하는 방식,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를 것 같아요. 사랑 개념을 일방적으로 독점하려는 사람들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는 바뀌어야 한다" 식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데, [신부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랑이라는 것이 나 자신의 깨짐과 연결되어 있다면, 내가 내 몸과 자아에서 빠져나와서 타인을 향하는 것 —그건 불가능하지만, 말 그대로 내 몸이 깨지는 경험을 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 사랑은 "이해"라는 표현으로 퉁 치기에는 협소한 단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랑은 굉장하고 어쩔 수 없이 신비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라파엘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 완전한 형태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시도하려고 했을 때 우리가 한 발짝 정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나 사랑 잘하지"라고 생각하고 시작해요. "나 정도면 포용성 있지." 근데 그 생각 자체가 없어지지 않으면 시작이 안 되는 게, 저는 진짜 사랑인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는 계속 교만함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요. "당신의 세계는 완결된 것이 아니다, 당신의 어떤 자기 완결적 표현들이 깨지지 않으면 그 어떤 존재와도 사랑할 수 없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비타       사랑 어렵다.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사랑이라고 한다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사랑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운동으로 빗댄다면 트레이닝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라파엘    감사성찬례의 핵심은 성서 말씀을 듣는 것과, 그 말씀을 들은 우리의 반응으로서 빵과 포도주를 나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예수님을 모신 자로서 살아가도록 다짐하는 것. 예수님 그 자체인 성체와 보혈을 내가 먹고 마시잖아요. 저는 그것이 내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상징적 행위라고 생각하거든요. 세례라는 행위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하는 거잖아요. 죽었다가 태어날 때 이제 "나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서 매주 성찬례를 통해서 빵과 포도주를 내가 받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심으로 내가 사랑받고 있는 존재인 걸 확인하고, 세상에 나가서 사랑받는 존재인 것처럼 살려고 하는 거죠.
 
비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좋은 삶은 무엇일까요? 
라파엘    저는 좋은 삶이라는 게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는 그냥 아침에 눈 뜨면 좋은 삶이다.
비타       살아있는 것 그 자체.
라파엘    네.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삶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좋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또 생기잖아요. 일단 그것을 주의해야 하고... 우리가 내일을 자신의 힘으로 당겨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눈을 떴더니 오늘이 된 거죠. 이 '오늘'을 내가 공짜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 그러면 오늘을 한번 잘 써볼까 하고 오늘 하고자 하는 일들을,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이라는 걸 해보려고 시도하는 오늘 정도가 됐을 때 "오늘 괜찮았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라파엘    혹은, 항상 좋은 날만 있진 않잖아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 있을 때는 그다음 날 눈 뜨는 게 어렵기도 하고 눈 뜨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그랬을 때 눈을 떴을 때 "그래, 오늘은 어제보다 좀 나아지려나"라는 생각도 좀 할 수 있고.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고 공동체가 있고, 저는 그 정도면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비타       모든 걸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현실과 맞물리지 않는 불가능한 지점이 있지만, 오히려 내가 세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라파엘    그게 사실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기본 핵심 중에 하나예요. "당신은 굉장히 존귀한데, 당신은 진짜 아무것도 아닙니다"가 함께 존재하는 거죠. 존귀한 사람으로도 살지만, 동시에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여기에 그냥 속해 있는 한 존재일 뿐이다라는 걸 인정하는 과정도 필요한 거잖아요. 그러다 보면 나 스스로의 균형을 맞출 수 있고, [내가] 흔들릴 때 잡아주는 것도, 내가 스스로를 잡기도 하지만 외부가 나를 잡기도 한다는 걸 인정할 수 있어요. 좋은 삶은 목적지가 아니고 그냥 과정인 거니까요. 어떻게 [좋은 삶인지] 알겠어요, 죽어봐야 알죠.
비타       여성학에서도 '모든 존재가 독특'하기 때문에 어떤 존재가 더 독특하다고 말하지 않는데, 방금 말씀하셨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누가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와도 이어지는 것 같네요.
라파엘    그것도 굉장히 신학적인 부분이거든요. 하느님의 사랑은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했는데, 뭔가 내가 기도를 더 열심히 하면 하느님이 나를 좀 더 사랑해 주지 않을까 같은 경쟁조차도 버리고, 똑같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안정감, 그걸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비타       그 말씀을 하시니 좀 짓궂은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를테면 내가 열심히 좋게 살거나 깽판 치고 살거나 하느님 앞에서는 똑같은데 왜 깽판 치면 안 되지라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라파엘    깽판 치면 안 되는 이유는 그게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은 아니기 때문이죠. 대답은 되게 단순할 수 있어요. 마음대로 살아도 되거든요.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돼요.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렇게 나의 자유를 방종으로 선택했을 때, 나와 똑같이 특별한 존재들에게 이 선을 넘어가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제한을 해야 하는 의무도 발생하는 거죠. 왜냐하면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쟤도 똑같이 사랑하는데,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저 사람이 이 불편함을 겪게 만드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게 되거든요. 그래서 깽판을 치면 안 되는 게 되는 거죠.
비타       예전에 비슷한 질문을 제 수교도지 (편집자주—거꾸로 읽어보세요) 에게 여쭤봤는데 "사랑한다면 그렇게 못한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깽판 치지 말자'는 '~해야 한다'는 의무의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인식한다면 어떤 존재에게도 그런 짓을 할 수 없게 된다, 비슷하게 들렸어요.
라파엘    저는 이제 거기에 하느님이라는 양념을 집어넣어서 얘기하는 거죠.
 
비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신부님께서는 설교를 할 때 전도나 천국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궁금합니다.
라파엘    저는 전도 같은 얘기는 잘 안 하죠.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그렇게 단숨에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는 전도는, 그래서 친구가 되고 친구가 되어 주고, 누군가가 내 삶을 보고 "저 사람 삶에 도대체 뭐가 있길래 저렇게 살까"—그러니까 막 성자 같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오늘 하루가 즐겁고, 생각하는 방식이 좀 더 밝고, 좌절 같은 걸 했을 때 다시 일어서기도 하고, 이런 모습들을 쭉 보면서 "저게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인가, 나도 그럼 한번 가볼까"같은 걸 생각하게 하는 게 저는 진짜 전도라고 생각하고요.
라파엘    그리고 천국은, 이건 어쩌면 좀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인데—일단 저는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얘기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근데 이 생각의 기반에는 "하느님은 그 누구도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인간이 지상에서의 삶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건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심판이 없으면 너무 억울한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그 심판도, 심판의 주체가 하느님이시니까,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닌 거예요. 악인을 제가 처벌할 수 없는 거고요. 나는 그 [사후 판단의] 자리를 하느님한테 맡기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야 하는 거죠. 그리고 이 얘기가 교회가 하는 얘기의 전부예요. 지옥을 강조하는 교회, 그러면 그건 사실 교회가 아닌 거죠.
비타       제가 성공회를 다녔을 때 인상적이었던 설교는 "여기 이 땅에 이미 천국이 와 있다"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정말 급진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미 천국이 와 있으니, 천국에 사는 존재로서, 천국인의 태도로 살아야 천국이 와 있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라파엘    그리스도교가 사랑을 자꾸 말하는 이유는 거기서부터 오는 거예요.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보이는 반응들은 분명히 다르거든요. 위축되지 않고 움츠러들지 않고, "그래, 나 뒷배가 있어, 내가 한번 해볼게, 내가 손해 봐도 괜찮아, 난 억울하지 않으니까." 이런 것들을 하기 때문이죠.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와 있다는 선언은 사실 이미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하신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그런 얘기를 해야 되는 거죠. "당신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니 그렇게 사시오, 사랑받는 존재로 어디 가서든 당당하게 사시오." 어떤 것도 당신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짱이니까요. 되게 심플해요.

성공회 동래 교회에서의 풍경

4. 성소수자와 교회: 결혼은 모두에게 소중하죠

비타       교회에서 성소수자 교인을 만났거나 성소수자 친구들과 만난 경험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라파엘    성소수자 교인이요? 뭐 많죠. 굉장히 많고, 기억에 남는 건 아까 그 형의 이야기예요.
비타       아, 그분이 성소수자 셨군요. 
라파엘    네, 제가 생각하는 성소수자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어요. 저도 나이 들고 형도 나이 들고, 요즘에는 이제 막 중년의 고민을 하거든요. 성소수자 세계도, 이성애 세계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었을 때 커뮤니티 내에서의 가치, 시선 등이 복잡해진다거나. 우리끼리 막 얘기할 때 이제 "PC한 거 그만하자, 지친다"이런 얘기하면서, 그냥 "언PC한 발언으로 얘기하자"이런 거 막 깔깔거리면서 하거든요. 이제 중년이 되다 보니까 어떤 자기 권리를 막 주장하고 이런 부분에서 좀 자유로워졌어요.
라파엘    자기 일이 있고 만나는 애인도 있고, 이게 뭔가 되게 평범한 거예요. 그런 거 보면서 "그래, 그럴 수도 있구나, 나도 마찬가지고" 뭐 이런 생각도 좀 하고. 그 형도 그렇지만 이제 다른 성소수자 친구들도 지금 보면 다들 자기 일들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거든요. 근데 그 친구들이 20대 때만 해도 진짜 불꽃같은 사람들이었어요. 그 20대 때 동안 그렇게 불꽃같이 막 투쟁하고 고민하기 때문에, 지금의 자기들의 삶을 이렇게 만들어냈던, 그리고 자기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안에서 되게 건강한 관계들을 유지해 가면서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아닌가. 이제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저는 오히려 요즘에 그들을 보면서, "인간, 결국 진짜 다 똑같다."
라파엘    결국엔 우리가 다르지 않구나라는 걸 확인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자신의 어떤 정체성을 뒤늦게 깨달은 분들은 또 그 투쟁의 역사를 반복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나이의 문제는 아니구나. 소수자들은 소수자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태어나는 시기이고,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없이 청소년기를 보내야 하는 거고, 이걸 잘 보내야, 이 소위 말하는 발달 과업을 잘 이루어야 다음 단계로 건강한 성인이 될 수 있는 건가, 이런 생각도 좀 하게 되고.
라파엘    저는 모두가 다 기억에 남는 친구였던 것 같아요. [친구들이] 저를 깨뜨리기도 하고, 저를 통해서 그들이 뭔가 변하는 것도 있었고. "아니, 누가 너 안 잡아먹지 않냐. 호모포비아가 너한테 막 얘기해도, 너는 그냥 내 친구고, 우리는 똑같고, 네가 어디 가서 죽는 게 아닌데. 그럼 나랑 재미있게 살아." 이런 식으로,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대화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비타       현재 교회에서는 어떻게 적용하고 계신가요?
라파엘    교회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지만, 일단 똑같이 대하는 것 같아요. 초기에는 저도 더 조심스러워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히려 차별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제가 뭔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격하시키든 격상시키든 해놓은 거잖아요. 근데 동일한 존재로서 대해야 비로소 대화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해서, 이 교회에 찾아오는 소수자 분들에 대해서는 그냥 똑같이 편하게 대하게 된 것 같아요. 그게 이제 저의 20~30대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게 아닐까.
비타       말을 덧붙이자면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이나 문제가 온전히 개인만의 몫은 아니고, 사회 구조화된 지점도 있고 역사화된 지점도 있기 때문에, "동일하게 대한다"라는 표현이 자칫하면 몰역사적으로 느껴지는 표현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신부님이 말씀하셨던 "동일하게 대한다"는 몰역사성을 넘어서 함께 걱정하기, 염려하기, 이어지기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라파엘    말을 오해하는 건 괜찮은데, 우리는 말 때문에 존재를 오해해 버리잖아요. 그 발화의 주체를 오해하잖아요. 그래서 "저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나 봐, 저 사람은 나 싫어하나 봐"같은 생각 때문에 대화가 확 거두어지는데, 저는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걸 지향하는 편입니다.

비타       다음 질문은 현재 한국 교회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성소수자 신도들을 포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작동하거나 그렇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파엘    성소수자 신도를 포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죠. 이거는 무지이기도 하고 두려움인 것 같기도 해요. 몰라서 못하는 것도 분명히 있고요. 세상에는 성소수자라는 존재 자체가 인식의 틀 속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누구를 만났을 때, "저 사람이 소수자일지도 몰라"라는 생각 자체가 아예 없으니까, "여자친구 있어요?"가 바로 튀어나오고. 그래서 이런 거는 근데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닌 거라는 걸 어떤 부분에서는 이해할 필요도 저는 있다고 생각해요.
라파엘    그래서 감수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한 말에, "진짜 저의가 뭘까"에 대해 고민하고, 그리고 그걸 좀 더 긍정적으로 사랑으로 이해해 보려는 것. "그냥 저 사람이 나랑 대화를 시작하고 싶은데 뭐라고 말할지, 이 어휘의 빈곤으로 인해서 기껏 꺼낸 말이 저거일 수 있겠다"라는 정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해가 아닐까. 그리고 말하는 사람도 주의해야죠. 내가 지금 말하기 전에 내가 이 얘기를 왜 하고 싶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고.
라파엘    저는 옛날에 베냐민(편집자 주-비타의 성공회 세례명은 베냐민) 이 여기 위에서 설거지할 때 있었던 사건이 아직도 되게 많이 기억나거든요. 베냐민이 OO이랑 같이 이렇게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A 신부님이 들어오셔가지고 "남자들은 설거지를 잘해야 장가를 잘 가"했는데, 그때 베냐민이 뭐라 그랬냐 하면, "그럼요. 결혼은 모두에게 소중하죠"이렇게 말했는데. 저는 그때 굉장히 뭐라 그래야 될까요, 안심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게 확 있었어요. 베냐민의 대답은 모든 이에게 필요한 혼인 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해 버린 거죠.
라파엘    그래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구나, 저도 "나도 이렇게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보면 이 말이 소수자들이 좀 더 유연해져야 된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서로가 유연해줘야 되는 거죠. 이 발언이 공격이 아니라 저 사람이 몰라서 그런 거고,  무지로 인해 발생한 일인 거고, [교회 안에서] 차곡차곡 알아갈 수 있는 서로의 시간을 줘야 하는 거지, "이 멍청한 이 혐오 세력아"고 잘라내는 것은 결국에는 모두에게 상처로 남지 않을까요.
비타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전혀 기억에 남지 않네요. 설거지에 집중을 했나 봐요. (웃음) 무한한 사랑에 대한 경험이 그런 것들을 가능케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는 언어는 맥락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잖아요. 이를테면, 소수자 워크숍이나 세미나에서 어떤 사람들은 "소수자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온건해야 하고 유연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자주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말은 사실 서로 간의 평등한 대화나 소수자에 대한 지지라고 느껴지기보다는, 대중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우리가 불편하지 않게 너희가 적응해라고 말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는 아직 더 많은 언어를 발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꺼이 상처를 받아야 하는 과정도 필요하죠.
라파엘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는 만큼[만]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아예 버리고, 나는 그냥 사랑하겠다라는 시작이 있으면, 그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열매를 맺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베냐민이 했던 얘기를 생각해 보면, 발화자를 생각해 보면 A 신부님이잖아요. 80살 된 할머니란 말이에요. 이분의 머릿속에는 아예 그런[성소수자] 개념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가 어렵죠. 그런데 이분도 굉장히 소수자적인 삶을 살았어요. 그렇죠, 여성이고 신부잖아요. 그러면 동시에 이런 조건들을 다 이해했을 때, 저분에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를 다시 생각해 보고, 저분의 발화는 나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거구나. 내가 누군가와 사랑하는 관계를 만들어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구나. 그런데 A 신부의 [마음속] 지도 속에는 여자와 남자밖에 없는 거지만, [A 신부가] 이 지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믿고, 그 자리에서 잘 다독여 놓고, 기회가 있을 때 더 이야기를 진행하는 이렇게 되면 이상적이잖아요.
라파엘    저는 한국교회가 그걸 해야 되고, 교회는 원래 그런 걸 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해요. 사랑하지 않으면 몸을 이룰 수 없죠. 한국교회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한 번 세게 좀 무너져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이 너무 교회가 갖고 있는 게 많아요. 교회는 소수자에 대한 고민, 그리고 사랑이라는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걸 얘기하는 순간,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이 제도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상황이 오니까, 알고는 있지만 말하지 않고 있는 것도 저는 꽤 많다고 생각합니다.
비타       방금 얘기하셨던 게, 오늘 제가 동래교회를 인터뷰했던 이유기도 해요. 섬돌향린교회라든가 용산 나눔의 집은 이른바 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로 대표성을 갖고 있고 실제로 활동도 하고 있죠. 제가 그곳에 연락을 해서 인터뷰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제가 부산에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 혹은 웹진 독자들이 갈 수 있는 곳, 동네에 있는 곳을 인터뷰하는 게 중요하지, 저 멀리 있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알리는 건 일종의 잔인한 낙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성공해서 성소수자 감수성 구린 지방 탈출하고 서울로 가면 저런 걸 누릴 수 있을 거야"라는 인식을 더 강화시킬 수 있는 거고, 이러한 방식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방 혐오라고 생각하거든요. 부산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웹진인데 "서울에는 저런 게 있으니 서울에 가라."그런 결론이 되면 너무 이상한 것이죠.


[편집자 주]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 문화이론가 로런 벌런트(Lauren Berlant)의 개념.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오히려 현재의 불평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라파엘    제가 지향하는 교회의 모습은, 오히려 "퀴어 프렌들리한 교회"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게 제가 바라는 모습이에요.
비타       여대의 목표가 여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는 것처럼요.
라파엘    퀴어 프렌들리한 교회라는 게 있는 한, 다른 교회가 퀴어를 경험하지 못할 것 같아요. 소수자는 먼저 사랑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런 공동체에 들어가서 "이게 사랑이야"라는 걸 보여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인 거죠. 내가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사랑이 없는 공동체에 가서 사랑이 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근데 대체로 우리는 무균실을 원하는 것 같아요. 근데 세상은 무균실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그 균을 정화하는, 청소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무균실을 만들어서 그 안에만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럼 나도 사실 결국 취약해질 뿐이잖아요.
라파엘    그래서 교회에 프라이드 플래그를 건다거나 이런 것들이 오히려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에요. 이게 누군가에게는 이 말이 굉장히 상처일 수도 있어요. [성소수자] 지지 선언을 통해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하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와서, 모두가 지지받을 수 있는, 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지받을 수 있고, 서로가 오해하지 않고 사랑이 무언지를 배워갈 수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게 제가 생각하는 지향이고요. 제가 누가 찾아오면 그런 얘기 꼭 하거든요. "유토피아를 찾아왔으면 잘못 왔다고. 그런데 만들어 갈 생각이 있으시면, 그래도 같이 한번 해보자."
비타       저도 신부님이 말하는 교회의 최종 지향점으로는 동의를 하지만, 일련의 지지고 볶으며 상처받는 과정 없이는 이상향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이미 '동성애 결사반대'로 코드화되어 있고, 어떤 성소수자들은 교회 옆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학습화된 공포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프라이드 플래그가 갖고 있는 어떤 안심의 역할들, 그런 것들에 저는 되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잖아요.
비타       정치 철학에서는 긍정(affirmative) 전략과 변혁(transformative) 전략이라는 게 있어요. 흑인 민권운동을 예로 든다면 흑인이 지난날 많은 차별을 겪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맞추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대학교 입학 등을 지원을 해주는 전략이에요. 흑인이라는 정체성이 가지는 부정적 의미를 떼어내 주려는 시도죠. 반면 변혁 전략 같은 경우는 인종이라는 경계 자체를 부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저는 긍정 전략과 변혁 전략이 함께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건 변혁적인 지향, 즉 성소수자 프라이드 플래그가 없어져야 하는 미래가 반갑긴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 차별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긍정 전략과도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무지개 예수나 차세기연(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 같은 활동을 지역에서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편집자 주] 무지개 예수·차세기연: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성소수자 친화 기독교 단체들. 부산 지역에는 이에 해당하는 공개·공식 단체가 현재 없다.

 

[편집자 주] 긍정 전략과 변혁 전략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는 방식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긍정 전략(affirmative remedies)은 불평등을 만들어낸 구조보다는 결과를 교정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변혁 전략(transformative remedies)은 불평등을 발생시키는 근본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성소수자 권리 운동을 예로 들면 이렇다. 동성 커플에게 이성 커플과 동일한 법적 혼인 권리를 부여하는 혼인 평등법은 긍정 전략에 가깝다.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는 건드리지 않은 채, 그 제도에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을 넓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반면 결혼 제도가 왜 이성 결합을 기본값으로 삼아왔는지, 그 이성애 중심적 구조 자체를 해체하자는 퀴어 이론의 문제 제기는 변혁 전략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를 위한 별도의 친화적 공간(퀴어 프렌들리 교회, 퀴어 바, 프라이드 행사)을 만드는 것은 긍정 전략이고, 어떤 공간에서든 성소수자가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변혁 전략이다.
프레이저는 두 전략이 각기 다른 딜레마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긍정 전략은 '성소수자'라는 범주 자체를 고정·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퀴어 프렌들리 교회를 따로 만드는 것은 역설적으로 "일반 교회는 퀴어를 환대하지 않는다"는 경계를 재확인하는 셈이 된다. 변혁 전략은 보다 근본적이지만, 단기적으로는 가시적 효과를 내기 어렵고 지금 당장 차별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레이저는 두 전략을 대립시키기보다, 단기의 긍정 전략과 장기의 변혁 전략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본다. 
성공회 동래성당


 
라파엘    참 부산에 그런 게 없어서 좀 아쉽긴 해요. 제가 우리 교회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런 발언들이 공식 석상에서 등장했을 때 그것들은 잘못됐다는 얘기를 하는 건 제 의무인 거죠. 청년들이 발언이나 이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거. 또 반대로 어떤 소수자 청년이  갑자기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전혀 이런 걸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받을 충격과, 그 사이에 껴가지고 완충지대가 되어주는 것도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 두 가지가 서로 계속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저의 실질적 지향점이죠.
비타       심리 상담사 같은 역할 같기도 하네요.
라파엘    배운 게 도둑질이라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편집자주—신부님의 박사 전공은 교육학·상담심리)

비타       신부님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들을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라파엘    소수자가 아닌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소수자 혐오라는 생각 없이 쉽게 말하는 것들이 많아요.
라파엘    예를 들면, "너 게이야?"이렇게 얘기하면, "그렇게 표현하는 게 썩 좋은 방법은 아니야"라는 얘기를 꼭 한 번씩 짚어줘요. "너 그렇게 말하면 차별주의자야"라고 말하면 이거는 관계를 단절시키는 게 돼버리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 "꼭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다"라든가 이런 식으로 많이 이야기를 제가 적어도 속해 있는 집단에서는, 그런 감수성들이 조금씩 자라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비타       맞아요. 대부분의 혐오는 "선량한 차별주의"의 모습으로 다가오죠. 의도치 않았지만, 그게 구조적 차별을 양산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성소수자들이 연애나 연인에 대해 교회에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들도, 다른 교인들이 "동성 애인 말하지 말라" 고 하지 않았는데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구조적인 차별인 거죠.
라파엘    다행스럽게도 우리 예배 안에는 차별이라고 생각할 만한 용어들이 많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가끔 "형제자매"를 "자매 형제"로 바꿔 본다거나, 또 번역어로서 옛날 번역된 것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있어서, "소경" "귀머거리" 이런 표현들은 읽을 때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바꿔요. "눈이 보이지 않는 이", "들리지 않는 이" 
라파엘    성서에는 여성 비하적 표현들도 많아요. "창녀" 이런 표현들이 나오거든요. 이건 참 바꾸기가 어려운 표현이긴 해요. 성노동자라고 말하기는 진짜 어렵거든요. 성매매,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 되는 상황, 성서가 기록된 맥락에서의 상황에서 이 사람들이 겪었을 차별을 현시대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설교에서 많이 녹이려고 하는 편이에요.
비타       제가 좋아하는 사상가 중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라는 프랑스 사람이 있어요. 과학기술학자로도 유명하지만 정치신학으로도 작업을 하셨어요. 그분이 예전에 썼던 논문 중에 하나가[각주:4] 과학과 정치와 신학적 언어 행위의 차이에 대해서 얘기를 하시는데,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과학은 멀리 떨어진 것을 재현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것, 정치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동료를 호명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신학이라는 것은 현전하는 삶의 감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 내용을 글자가 보존된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본질적인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고, 지금 여기 이 장소에서 맞게 번역하고 해석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인 거죠. 방금 얘기하셨던 "창녀"나 그런 표현을 다른 표현방식으로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적 가치를 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라파엘    그리스도교가 독특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급진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급진적이라고 말하면 주로 진보적 성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근데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급진성의 특징은 불변이거든요. 이 기준은 바뀌지 않는 거예요. 이 기준은 사랑인 거죠. 저는 교회와 신학이 사랑이라는 기준점을 세워놓고 세상의 기준이 되어 주고 있다고 보는 편이에요.


5.  나가며: 중요한 건 일상을 지켜내는 일

비타       웹진 지난 호 에세이에서도 교회 얘기가 나왔어요.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차별을 겪었지만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견디면서 다닐 거라는 말이었는데 전 그게 신경 쓰이더라고요. 현재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은 냉담자, 혹은 차별을 경험하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성소수자에게 하실 말이 있으실까요?


[편집자 주] 냉담자: 세례를 받았으나 신앙 활동을 중단한 신자를 가리키는 종교 용어.


라파엘    저도 사실 그거에 좀 놀랐어요. 수영로 교회[각주:5] 같은 데 가는 성소수자들이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 갈 수 있죠, 크니까. 신도가 만 명인데.
라파엘    이제 부모님 때문에 가는 것도 있고,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기 전부터 맺어왔던 친구 관계와 모든 인간관계가 거기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냥 거기에 있는 건데 저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분들에게, "우리 교회로 오세요"같은 걸 하고 싶지 않아요. 대신 그곳에서 하고 있는 행동에, 자신이 하고 있는 종교 활동에 자신의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나에게 예배가 무슨 의미인지, 나에게 이 사람들은 어떤 의미인지를 찾아보는 과정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행동은 그대로지만, 정의하는 건 내가 할 수 있잖아요. 의미를 새롭게 정의해서 그 의미를 잘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라파엘    그럼에도 가끔 이제 교회가 하는 말이 너무 막 피곤하다,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요? 결국 소수자든 소수자가 아니든 삶의 기준을 세우고 정돈하는 건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종교 활동, 이 리추얼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고. 이제 독립해서 더 이상 부모님 교회 안 나가도 되면, "아, 이 공동체와 함께 해보고 싶다"는 교회를 찾아가 보는 용기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라파엘    교회에서 상처받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그거는 제가 단언하건대, 복음은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니까요. 모두가 자유롭고 모두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상처받는 말은 교회가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아요. 하느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부족한 인간의 자기표현이었을 뿐이니, 그걸로 하느님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느님은 그렇게 [사람을] 쫓아내지 않거든요. "너 하느님 잘못 믿었네"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도 될 것 같아요.

비타       마지막으로 신부님께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라파엘    저에게 중요한 건 그냥 오늘 주어진 삶인 것 같아요.
비타       오늘 주어진 삶. 그렇게 말하니까 마시멜로 이야기, 자기 개발서처럼 느껴지는데 부연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라파엘    오늘 제가 어디 가고 싶은 데 갈 수 있고, 일해서 월급도 받을 수 있고, 수다 떨고 싶을 때 친구한테 연락도 할 수 있고. 그리고 누가 내 얘기 듣겠다고 찾아와 주는 경험도 하고, 이런 모든 일상을 잘 지켜나갈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근데 제가 일상을 지키려면 다른 사람의 일상 또한 지켜져야 되거든요. 우리의 일상이 무너지면 이것들이 불가능하죠. 그래서 일상을 지킬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싶어요.
비타       일상을 지키는 노력이 리추얼이군요.
라파엘    제 개인의 리추얼이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가 함께하는 리추얼이기도 하고. 이제 온 세상의 교회가 같이 하는 리추얼도 있는 거죠. 그것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탱해 가고, 우리가 그것을 우산 삼아서 잘 지낼 수 있는 것. 중요한 건 일상이고, 일상을 지켜내는 일인 것 같아요.
비타      일상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은 결국 무한한 사랑이다. 인터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요?
라파엘    "사랑밖에 난 몰라"로 하겠습니다.
 
 


주석

  1.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5808 [본문으로]
  2. https://www.skh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864 [본문으로]
  3. 천주교회(로마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위계를 가지고 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명확하고 이에 따라 역할과 권한의 차이 또한 분명하다. 반면 개신교회는 교단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두가 평등하다고 본다.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같이 성직자와 평신도의 직제가 구분되어 있고 이에 따른 역할과 권한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평신도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또한 모든 위계의 정점인 교황과 같은 존재가 없으며,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 성공회 공동체가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로 기능할 뿐, 통치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4. Latour, B. (2001). “Thou Shalt Not Take the Lord’s Name in Vain”: Being a Sort of Sermon on the Hesitations of Religious Speech. Res: Anthropology and Aesthetics, 39, 215–234. https://doi.org/10.1086/RESv39n1ms20167530 [본문으로]
  5.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대형 개신교 장로교회.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표방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