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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세라 회원 에세이

[회원 에세이] 난 아직 네가 준 향수를 가끔 뿌려

by pnuquesera 2026. 7. 6.

난 아직 네가 준 향수를 가끔 뿌려

작성: 영지
편집: 채원

 
 

  그녀는 웃는 얼굴이 예뻤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염색한 금발의 곱슬머리가 어깨까지 왔고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K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남미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스페인어를 잘했다. 친구들과 홈 파티를 하는 날이면 아이라인을 짙게 그리곤 했다. 그게 눈 안에 담긴 슬픔을 덮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

 
  K를 처음 만난 것도 그녀의 홈 파티에 초대받았던 날이었다.
  기숙사 공용 부엌에서 한식을 그리워하며 친구들과 닭볶음탕을 만들던 어느 날, K가 친구를 보러 기숙사에 놀러 왔다. 정 많은 한국인답게 우리는 K에게 닭볶음탕을 먹여주었고 그녀는 우리를 집에 초대해 주었다. 평범한 미국 이층집의 이층 다락방에 그녀는 월세를 내며 살고 있었다. 비스듬한 천장에는 나비 모양 종이 모빌들이 달려 있었고 방의 가운데에는 딸기 패턴의 이불이 덮인 퀸사이즈 침대가 있었다. 그날 초대받은 사람들은 대략 일곱 명이었다. 그 이후로도 고정 멤버가 된 우리는 금요일 밤마다 홈 파티를 했다. 미국 시골 마을 어딘가에 있는 이층 다락방 홈 파티였다.
 
  20대 초반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이 우리는 모여서 술을 마셨다. 만 21세가 넘는 사람[각주:1]이 대표로 주류 판매점에서 사 온 과일소주, 맥주, 보드카, 술이 섞인 레모네이드까지 손이 닿는 대로 섞어 마셨더니 모두가 다 취해버렸다. 취한 채로 스포티파이로 노래를 듣고 춤도 췄다. 그러다 배고파지면 피자를 시켜 먹고 배불러 잠들곤 했다. K는 여동생 여럿을 둔 이력을 뽐내며 아메리칸 스타일로 여자애들 머리를 땋아주기도 했다. 그게 왠지 모르게 좋아서 그다음 날까지 그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살짝 쪽팔리네. 아무튼 그렇게 몇 번 K를 만났고 두세 번째 홈 파티쯤에 그녀가 팬섹슈얼이라는 사실과 남자 친구와 최근에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쯤 알았던 것 같다.
   ‘아 나 얘 좋아하네.’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는데 내가 왜 기분이 좋냐. 그건 K를 그저 친구로만 여겼다면 느끼지 않았을 감정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술을 진탕 마신 날 우리는 잼컨[각주:2]을 찾다가 결국 Truth or Dare[각주:3] 보드게임을 하게 된다. 이 악랄한 게임의 진실 카드에는 좋아하는 사람 말하기, 벌칙 카드에는 섹시 댄스 추기와 같은 것들이 나왔고 술에 취한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카드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다가 내가 카드를 뽑았는데...
   ‘썅, 이건 뭐야. 누군가에게 키스를 받아라?’
  어이가 없어서 다른 카드를 뽑으려고 했다. 미국이라 역시 게임 수위도 다르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순간 K가 다가오며 딱 세 마디를 내뱉었다.
    “I’ll do it.”
  곧바로 존나 박력 있는 키스를 받고 머리가 하얘졌다. 그 이후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여자랑 한 첫 키스였다.
 
  그날 밤. K는 조만간 데이트하러 가자고 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핑크빛 세상이 펼쳐지는 걸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추며 덤덤한 척 좋다고 했다. 그러자 K는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내가 팔레스타인 편이냐고 물어봤던 게 기억난다. 정치적인 이슈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K 때문에 나는 한국 정치보다 미국 정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그 애는 그런 식으로 나를 조금씩 바꿔놓았다.
 
  데이트 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 줄 꽃을 꺾어왔다. 주변에 그 흔한 꽃집조차 없는 시골이었기 때문이다. K가 준 꽃은 그녀의 머리칼을 닮은 노란 수국이었다.
 

그날 받은 수국은 어느 소설책에 고이 끼워두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스타벅스였는데 그 주에서만 살 수 있는 머그컵을 팔고 있었다.
    “우와 이거 예쁘다.”
  나의 한마디에 K는 바로 그걸 집어 계산대로 가져갔다. (지금 생각하면 걔는 아무래도 긴머부[각주:4]가 맞았던 것 같다. ) 아무튼 나는 머그컵과 아아를, K는 스트로베리 레모네이드를 들고 그 애가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있댔다. 도착한 곳은 그녀의 인스타 게시물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철로가 깔린 으슥한 강변이었다. 원피스를 입고 예쁘게 꾸미고 있던 우리 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녹슨 철근들과 끊긴 전선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노숙자 텐트도 보였다. 한국의 도시에서 자란 나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K는 이곳에 가장 자주 온다고 했다. 여기서 뭘 하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과제도 하고 시간도 때운다고 했다. 걔가 이런 곳에서 혼자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곳을 보여준 뒤 K는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한 정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꽤 큰 정원이 이름 모를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보는 꽃들을 구경하다 그녀에게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꽃이 뭐야?”
   “스파이더 릴리. 근데 미국에는 없어.”
 

레드 스파이더 릴리. (출처-위키피디아)

 
  그 큰 정원을 한참을 둘러본 우리는 정원 근처의 평화로운 강변 잔디밭에 돗자리 대신 담요를 깔고 앉았다. K가 샌드위치와 무지개색 조각 케이크, 런처블[각주:5], 감자칩, 포크를 꺼내 놓았다. 혼자 그 모든 걸 준비해 와서 그때까지 가방 안에 가지고 있었던 것을 나는 몰랐다. 가방에서 하나씩 하나씩 꺼내는데 되게 소중한 사람처럼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던 게 기억난다. 기분 좋게 따뜻한 햇볕 아래 둘이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다가 곁으로 다가온 오리들에게 샌드위치 조각을 던져주기도 했다. 오리가 내는 소리 같은 별거 아닌 것들에 꺄르르 웃으며 나를 위해 사 왔다는 무지개색 조각 케이크를 먹으려는데 포장지가 뜯기지 않았다. 번갈아 가며 낑낑거리다가 결국 저 멀리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의 부부에게 달려가서는 뜯어달라고 낭창하게 부탁하던 그녀. 잠시 후 해맑게 달려오며 “영지~ 이거 뜯어 왔어~” 하던 그 목소리와 얼굴에 피어난 미소. 어떤 순간은 기억 속에서 영원하다. 그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나는 아직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피크닉을 하고는 K의 집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그녀는 기면증이 있어 주로 택시를 타고 다닌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택시 안에서 K는 자신의 청소년기 얘기를 해줬다. 엄격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는데 사춘기 때는 그게 너무 답답해서 일탈도 많이 하고 가출도 많이 했다고 했다. 어느 날은 기차 짐칸에 몰래 올라타서 자기도 모르는 곳까지 갔댔다. 집에 어찌저찌 돌아온 날에 엄마한테 뺨을 맞았는데 맞을 만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공부가 청소년기 최대의 적이었던 내 세상과 K가 살아온 세상이 너무 다른 것 같았다.
    “니 인생 되게 영화 같다.”
  그 애는 말없이 그저 씩 웃었다.
 
  집에 도착하자 늘 여럿이 있던 방 안에 K랑 나 둘 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는 대뜸 술이 있냐고 물었고 다행히 저번 홈 파티 때 먹고 남은 술이 있었다. 술을 얼른 삼키고 침대에 걸터앉았는데 분위기가 야시꾸리했다.
    ‘이번에는 키스 안 해주나….’
  K를 빤히 쳐다봤더니 자기를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물었다. 술기운이 올라왔고 그걸 빌려 말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키스하고 싶어….”
  K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직접적으로 말 안 해주면 몰라.”
  그러고는 나를 눕히고 키스를 하며 내 위에 올라탔다. K한테 치약 맛이 났다. 키스가 거의 처음이라고 말하자 걔가 놀라더니 키스하는 법을 알려줬다. 혀에 힘을 빼라고 했다. 잘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키스했다.
 
  그날 밤의 기억이 희미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K가 향수를 줬다는 것이다. 침대 바로 옆 서랍장 맨 밑 칸을 열자 새것 같은 빅토리아 시크릿 향수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우리 엄마가 향수를 좋아해서 집에 향수가 많아.”
  K가 말했다.
    “하나 골라봐.”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어. 나한테 무슨 향이 어울릴 것 같아?”
    “플로럴 향.”
  나는 플로럴 향을 집어 들었다가 곧이어 내려놓고 그 옆에 있던 피스타치오 바닐라 향을 들고 공기 중에 뿌려 봤다. 그리고 그걸로 골랐다. K한테 나는 냄새랑 비슷한 것 같아서.
 

***
 
 

  그 해 내 나이는 스물하나였다. 영원할 것만 같던 순간들에도 끝이 온다는 것을 배운 나이이기도 했다. K는 자주 며칠씩, 심지어는 몇 주씩 잠수를 탔고 그게 너무 불안하고 힘들었다. 잠수를 탈 때마다 내가 분명히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 나랑 연락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고 믿었기에 늘 나 자신을 할퀴고 탓했다. 그러다 한 번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K가 일하던 버블티 가게 뒷골목에서 걔 손을 붙잡고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냐고, 있으면 말해 달라고 사정하듯이 물었다. K는 그런 거 없다며 그냥 자기가 너무 바빠서 그렇다고 했다. 그걸 믿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이 모든 게 너무 짝사랑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만하자고 했다. 생각해 보면 공식적으로 사귀지도 않았다. K는 장문으로 미안하다며 친구로라도 남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K는 완전히 잠수를 타 친구로 남기는커녕 내가 미국을 떠날 때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해가 두 번 바뀌고 스물세 살이 되어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 K는 그동안 연락을 못 한 이유를 알려줬다. 트럼프 당선 이후로 시행된 이민 제한 정책 때문에 아버지가 브라질로 추방당했고, 졸업을 못 하게 되었으며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불행이 이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연락을 끊게 되었다고,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세상이 K한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래전 일이지만 나를 많이 좋아했고 그걸 내가 알도록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고 했다. 힘들 때마다 자신을 고립시키는 버릇이 있어서지, 절대 내가 싫어서 연락을 끊은 게 아니라고 했다. 우리 사이가 잘 되기를 원했다고도 했다. 분명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내가 싫어서 연락을 끊은 것이라고 굳게 믿어온 지 일 년이 넘었던 때였다. 자주 나를 미워했고 때로는 그 애도 미워했다. 근데 내가 싫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자 마음속의 짓무른 상처에 새살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진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 아직 네가 준 키체인 내 가방에 달고 있어.”
 
  어느 홈 파티 때 네잎클로버가 새겨진 열쇠 모양의 키체인을 내 가방에서 떼어 K 가방에 달아줬었다. 부적이나 행운 같은 말들을 잘도 내뱉으며. 걔한테 없는 단 한 가지가 행운일 텐데.
 
무슨 말을 건넬까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
    “나도 아직 네가 준 향수 가지고 있어. 슬플 때마다 뿌려.”
  고백하자면 미국에서 돌아온 후 얼마간 그걸 차마 보이는 곳에 꺼내놓지도 못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꽁꽁 숨겨둔 그 향수를 다시 꺼내서 뿌릴 수 있게 되었다. 때때로 시간은 정말 약이었다. 세상이 조금 혹은 많이 미울 때, 그리고 K 생각이 날 때 그 향수를 나의 몸 곳곳에 흩뿌렸다. 세상으로부터 방어막을 치듯이.
 
  한참 뒤, 문득 생각나 찾아본 스파이더 릴리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꽃의 꽃말처럼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했다.
 
 


주석

  1. 미국은 만 21세부터 주류 구매가 가능하다. [본문으로]
  2. 재미있는 콘텐츠 [본문으로]
  3.  Truth or Dare 게임이란 한마디로 진실게임인데, 진실을 말하는 대신 벌칙을 고를 수 있고 그때는 상대가 시키는 벌칙을 해야만 한다. [본문으로]
  4. 긴머리 부치 [본문으로]
  5.  미국의 간편식 브랜드. 도우에 햄, 치즈, 페퍼로니 등 갖가지 재료를 올려서 먹을 수 있는 키트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