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케-)세라 회원 에세이

[회원 에세이] 정체성 수행을 하지 않는 바이는 퀴어일까?

by pnuquesera 2026. 4. 7.

정체성 수행을 하지 않는 바이는 퀴어일까?

 

작성자: 은

 

 


1. 또 돌아온 바이혐오 유행

간만에 트위터에 들어갔더니 또 바이혐 플로우(flow, 트위터의 유행)가 돌고 있다.

 

“이성혼 혜택 받으면서 퀴어 타이틀도 아득바득 챙겨가네”

“바이 인정 투쟁 그만해라”

“너거 시댁 가서 커밍아웃이나 해라”

 

기존 바이혐은 ‘바이인 거 숨기고 동성연애 하지 마라’ 여서 딱히 타격이 없었다. 아니 사귀어 보기라도 하면 억울하지도 않다. 근데 요번 플로우는 ‘기혼바이, 패션바이는 퀴어 관둬라’ 여서 몇 개 들여다보다가 뼈를 맞았다.

 

바이혐오에 대한 트위터 유저의 반응.



 

2. 그런데 정체성 수행을 하지 않는 바이는?

확실히 조금 찔리는 데가 있긴 해. 바이의 박쥐 같은 연애사를 간섭하는 건 원래 그게 바이니까 그렇다고 반박할 수 있다. 여자 사귀었다, 남자 사귀었다 하는 게 바이인데 정체성 수행을 잘하고 있는 거지. 근데 이성혼을 한 바이나 패션 바이처럼 이성애 규범에 동화되거나 그 밖의 이유로 정체성을 수행하지 않는 바이도 퀴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전에 부모님에게 케세라를 통해 간접 커밍아웃을 한 적이 있었다. 성소수자 동아리에 나간다고 했더니 그럼 너도 그거(;;)냐고 되물으셨다. 하는 말이

 

“근데 니 남친은?”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은 거지.”

“아무튼 사귀는 건 걔잖아.”

“...”

 

그 뒤로 그들이 성소수어쩌고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은 걸로 보건대, 내가 뭐라 하든 간 실제로 사귀는 건 남자니까 퀴어와 상관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웃프지만 이만큼 수행성을 잘 설명하는 사례가 없다. 버틀러 선생님에 따르면, 각자의 정체성은 실제 삶에서 반복되는 수행으로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그러니까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행에 의해 구성되는 대상인 것.[1] 부모님이 보기에 나는 이성애 규범을 따르기로 하고, 그걸 착실히 수행하고 있는 그냥 이성애자 1명이다. 아니 그치만 나는 퀴어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고, 남자 친구와 지인에게 열심히 커밍아웃을 했다니까? 반론해도 이성애 사회에서 이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퀴어 사회에서 나의 이성애 수행성은 잘 보이지 않거나, 보여선 안 되는 거고. 정상성 사회와 퀴어 사회 둘 다 하면 안 되나 싶지만, 하나를 골라라는 압력을 받기 때문에 정병이 온다. 정상성 쪽에서 ‘전 여자도 좋더라구요’ 하면 심약한 이성애자들은 바로 기겁을 할 것이고, 퀴어 쪽으로 가서 ‘전 남자도 좋아해요’ 하면 왜 여기 계시냐는 눈빛을 받는다.

 

진격의 언니들 14화. 와썹 멤버 지애의 고민. 출처: https://youtu.be/C-f04rpfl5c?si=K_nJKUjZ8evzPayL

물론 실제로 만난 퀴어 친구, 지인들이 결코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나 혼자 찔려서 퀴어들 앞에서 이성애스러움을 꺼내지 않으려 했다. 케세라에 가입할 때부터 나는 퀴어가 맞는지, 여기 있어도 되는지 바이의 고뇌가 시작됐다. 기나긴 디나이얼을 끝내고 바이섹슈얼로 정체화를 하고 나니 이성애 전환치료를 시도했을 때 만든 남자 친구가 달려 있었다. 내 정체성 수행에 걸리적거리니까 헤어져 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이미 정이 들었고, 퀴어 인권 교육을 하면 잘 따라오는 모습도 기특하여 케세라 출석과 이성애 활동을 병행했다. 그렇지만 케세라 사람들과 만날 때는 절대 먼저 ‘남자친구’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둘이 있을 때 학교 근처에서 부원을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피한 적도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남자 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이성애자라고 오해할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바이혐오 글을 보기 이전부터 이성과 사귀고 있는 바이가 퀴어 커뮤니티에 속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3. 바이의 변명

바이가 퀴어 커뮤니티에서 돌을 맞는 주요한 이유는 정상성 규범에 올라타서 혜택을 받는단 것이다. 젊어서는 동성애를 하다가 결국 결혼은 이성과 하는 바이. 우리 퀴어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언제든 선택지가 있는 바이. 퀴어와 정상성 양다리를 걸친 입장에선 솔직히 이성 연애가 편하긴 하다. 동성연애를 해야겠다는 굳은 마음이 없는 이상 이성연애-이성혼 루트를 타기가 훨씬 쉽다고 느꼈다.

 

일단 동성애를 하려면 연애 상대를 찾는 것부터 난관이다. 어플로 매번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 하는 건 못 해 먹겠고 동아리에서 만나기도 글렀다. 동성에게 더 끌리는 바이임에도 동성연애는 성사된 적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좋아한 짝녀부터 지금 좋아하고 있는 여자까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셀 수도 없는데. 그에 비해서 이성 연애는 어떤가. 가만히 있어도 나이가 차면 주변에서 소개해 주겠다며 떠먹여 준다. 어딜 가든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슷한 나이의 미혼 남녀를 주위에서 못 엮어서 안달이다. 자신이 의지만 있다면 선택지는 더 넓어진다. 가벼운 만남은 헌팅포차 아니면 술번개, 진지한 관계를 원하면 소개팅, 최대 효율은 로테이션 소개팅... 연애 상대를 찾는 헤테로 친구들은 눈이 미친 듯이 높지 않은 이상 금방 상대를 찾아 데려온다.

 

4. 퀴어자격심의위원회로 가자

오랫동안 여자를 몹시 좋아했으면 뭐 하나. 동성이랑 한 번도 사귀어 본 적 없는 바이를 퀴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나마 지금 시점에서 퀴어에 한 발 걸치겠다고 결혼 안 하고 버티고 있는데, 선택지가 있는 상황에서 안 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다. 혼인신고만 안 했지 나머지 모든 게 사실혼에서 이뤄지는 역할 수행과 똑같다면. 좋게 봐주면 저항이고 아니꼽게 보면 기만이다.

 

퀴어가 수행성이면 나는 퀴어가 아닌가. 도대체 퀴어란 뭘까? 누가 더 퀴어한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미뤄뒀던 생각거리가 다시 돌아온다. 정상 규범에서 벗어나면 다 퀴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나는 이성연애를 하고, 대(對)사회 커밍아웃도 안 하며 겉으로 보기에 일반인, 정상인을 수행 중이니까 퀴어가 아닌가?

 

내가 성소수자 동아리에 있는 게 맞나? 이걸 또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까? 트위터에 주로 상주하는 퀴어자격심의위원회로 가자.

 

“제가 이성 연애 중이긴 한데 정체화 전부터 사귄 거라 어떻게 참작이 안 될까요?”

“네. 아무튼 지금은 정체성 수행을 안 하고 계신 거죠?”

“그렇긴 한데 저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활동도 하고 있어요. 이걸로 정체성 수행 기준을 만족했다고 봐주시면 안 될까요?”

“아 예, 저희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이전에 사귄 전적 중에 동성연애가 없으시네요. 이러면 저희도 인정해 드리기가 어려워요.”

“지금 동성을 여러 명 좋아하고 있는데, 이걸로는 정체성 수행을 했다고 볼 수 없나요?”

“그걸로 바이 자격은 발급해 드릴 수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 퀴어 자격증은 어려우세요. 우선 바이 자격증을 따신 다음에, 폴리 아모리를 하셔서 퀴어 자격증을 따시는 게 어떠세요?”

“...”

 

자칭 퀴어 대법관님이 많이 계시지만 누군가 나서서 그가 퀴어 자격을 가졌는지, 아닌지 따질 수는 없다. 왜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노력해야 하는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퀴어 몇 명 없는데 퀴어라고 나서주는 사람이 생기면 좋은 거 아닌가 싶다. 퀴어 타이틀? 좋을 것도 없는데 그냥 떨이로 나눔 합시다.

 

 

5. 바이의 고백

바이혐오 트윗 중에서 제일 핵심을 찔렀던 말이 바이가 정상성 편입의 안락함을 누리면서 퀴어 타이틀도 갖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어라 어떻게 알았지, 틀린 말은 아니긴 해. 정상성 사회와 퀴어 사회에서 좋은 거만 쏙쏙 고르고 싶다. 비(非)퀴어 사회의 안정감과, 퀴어 사회의 마음 맞는 친구들을.

 

나의 퀴어 정체성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서도, 이곳에 계속 붙어 있는 건 마음 맞는 친구들이 많고, 여기에 있을 때 마음이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회성이 좋고 불만이 적었다면 뚜벅뚜벅 정상성 수행을 하러 걸어 나가지 않았을까. 물론 어느 커뮤니티건 나와 딱 맞는 곳은 없고, 나 역시 어떤 퀴어 모임에 나가느냐에 따라 때로는 사회생활 못지않게 어색함과 이질감을 느끼곤 한다. 그렇지만 여기처럼 나와 공통분모가 비슷한 곳도 없다. 나를 이루고 있는 여러 정체성 중에서 퀴어 정체성에 유독 애착이 간다.

 

이렇게 퀴어 근친성을 가지면서도 앞날에 불안이 심해서 퀴어 정체성을 열심히 수행하겠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갑자기 암에 걸리면 어떡하지, 고정적 수입원이 없으면 어떡하지, 반려인이 배신하면? 연금이 안 나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사고와 송사에 휘말리지 않고, 부모님 노후 대비가 되어 있으며, 자가 자차, 반려인과 번듯한 직장을 갖춰 남들 부러워할 것 없이 사는 삶... 너도 원하고 나도 원하는 것이지만, 이 욕망을 인정하기엔 뭔가 퀴어로서 모양이 빠진다. 퀴어도 안정적인 삶이 필요한데 말이다. 혼인평등권 요구와 생활동반자법이 안정적으로 살아보자는 대표적인 움직임이고. 나의 위치에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남녀 2명이 모여서 취직, 동거 후 집 구매)은, 너무나 전형적인 배신자 바이 같다. 의식적으로 퀴어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입하지 않으면 ‘역시 바이는 그렇다니까’ 측에 무게를 실어주는 꼴이 된다.

 

내 욕망이 바이혐오자들의 논리-기성 사회에 편입해서 혜택을 받으려 한다-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다시 정체성이 흔들린다. 이러면 나는 퀴어가 아닌데, 하고. 그래서 계속해서 내가 퀴어 정체성에 맞게 사는지, 퀴어 자격을 갖췄는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바이 콤플렉스 @퀴어방송

 

6. 진행형 결론

결국 퀴어란 무엇일까? 어느 정도 교과서적인 답은 나와 있다. 그 자신이 퀴어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린 문제란 것. 국힘 레즈비언, 재벌 게이처럼 주류 규범의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의 퀴어 정체성을 크게 인식 안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자기가 퀴어라는데 거기에 대고 바이인가 아닌가, 이성 결혼을 했나, 동성연애를 하는가 이걸로 다른 이가 나서서 자격을 부여할 수는 없다.

 

그러면 늘 따라오는 지겨운 말들이 있다.

“자기 퀴어 정체성을 인식하면 퀴어라고? 그럼 개나 소나 퀴어겠네? 이성혼을 한 유부남/녀가 사실 자기 퀴어라고 하면 뭐 어쩌라고? 어쨌든 정상성에 완전히 포섭돼서 그걸 수행하고 있는데!”

그렇지. 퀴어는 이상한 사람들이고, 정상성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성애 규범을 따라 살고 있는 기혼자가 자신을 바이라고 인식하고, 말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저들이 매번 걸고넘어지는 패션바이는 얼마나 되겠는가? 퀴어니스를 인식하고 굳이 굳이 스스로를 바이로 정체화하는 기혼바이는 모두가 이성애를 하는 건 아니라고 그 규범에 약하게 균열을 내고, 앨라이 자녀를 길러낼 수 있겠지. 이걸 나머지 퀴어들이 보기에 배부른 소리인 게 문제지만. 우리 ‘진짜’ 퀴어들은 배우자랑 혼인신고도 못 하고, 법적 지위를 보장받지도 못하는데, 너네가 앨라이 자녀 키워준다고 감사합니다~ 해야겠어??

 

결론, 애매한 퀴어인 바이에게도 나름의 고충과 한이 있다. 이 한이 다른 퀴어들이 겪는 차별과 속앓이에 비하면 비교적 났다고 할 수 있지만. 누구는 성별위화감을 느끼고 누구는 결혼하고 싶어도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는데, 바이는 고작 정상성? 죄책감 드는데 할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다. 바이 당사자도 우리가 겪는 문제가 다른 퀴어에 비하면 나은 상황임을 안다. 바이도 힘들다, 바이도 퀴어이다, 를 인정받으려는 게 아니다. 인정받으면 좋긴 하지만 그 이전에 퀴어 묶음에 속하는 수많은 어쩌고들과 어울려서 문제의식을 나누자는 것이다. 퀴어스러운 어딘가 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함께 있고자 한다. 퀴어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하여 수많은 퀴어어쩌고들이 요구하는 법적 권리를 얻게 되면, 바이 가시화 또한 이뤄지겠지. 이때 바이를 가짜 퀴어라고 매도하지 말고 끼워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가 더 퀴어한지를 가린다면 계속해서 퀴어 자격 검증이 이뤄질 것이다. 누가 대사회 커밍아웃을 하고, 퀴어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는지, 누가 퀴어스럽게 행동하는지...

 

끝으로 버틀러 선생님의 규범 개념 관련 글을 읽으면서 바이들의 인정 투쟁을 떠올려 보려 한다.

 

“규범이 수행성을 지녔다는 것은 수행이 규범을 구성한다는 것으로, 규범이 수행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수행의 반복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거나 약화되고 사라지는 유동적인 것임을 뜻한다. 개인은 규범을 수행적으로 반복하면서, 규범을 실천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고 느낀다.” [2]

 

 


[1] 2026 3월 고3 국어 모의고사 14~17번 지문. 버틀러 선생님의 수행성 글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쉽게 이해가 가서 인용함.

[2] 위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