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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세라 회원 에세이

[회원 에세이] 커밍아웃도 삼세판

by pnuquesera 2026. 1. 9.

작성자:  채원
감수: 웹진 편집팀
교정 · 편집: 비타

 

0. 

맛있는 걸 먹으면 자연스레 떠오르고, 실없는 농담으로라도 말 붙이고 싶던 그 애를 친구가 아닌 동성으로서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날,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내가 여자도 좋아할 수 있다니! 금사빠 짝사랑 중독 인생에 다신 없을 대박 이벤트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좋기만 한 일은 없는 법. 로또 당첨에도 세금이 붙듯이, 짝사랑 영역 2배(+α) 확장 뒤에는 ‘입 다물기’ 미션이 따라붙었다. 이제 막 여자 사랑에 발을 들여 아무나 붙잡고 주접을 떨고 싶은 맘에 입은 근질거리는데, 아무에게나 커밍아웃했다간 손절은 기본, 심하면 아웃팅까지 당할 수 있다니... 세율이 심하게 높은 거 아닌가? 이번 미션의 가장 큰 난관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엄마. 언뜻 봐도 포비아가 확실한 그가 딸이 양성애자임을 알게 된다면 그의 사랑을 잃는 건 물론,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갑작스레 시작된 사랑과 난관에 여러모로 두근두근한 양성애 인생이 시작되었다.

 

 

1.  

때는 바야흐로 2019년 제1회 경남 퀴어퍼레이드 날. 평소라면 바닥과 한 몸이 되어 날씨도 모른 채 흘려보냈을 토요일, 서랍 깊숙이 숨겨 두었던 무지개 깃발을 은밀하게 챙겨 나갈 채비를 했다. 평소와 달리 움직이는 딸을 수상히 여긴 엄마가 어딜 가느냐고 물어왔다. 대충 집회 같은 데 간다고 둘러대니 “학생 인권 그런 거?”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퀴어퍼레이드가 학생 인권 집회냐 하면 그건 아니긴 한데, 학생 인권 안에 성소수자 학생 인권도 있는 거고, 고등학생 바이로서 퀴퍼에 참석하는 건 어떻게 보면 학생 인권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나?’ 속으로 궤변을 늘어놓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퀴퍼에 간다는 걸 들키지 않을 대답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근데 퀴퍼 간다고 다 퀴어도 아니고, 솔직하게 말해도 별일 없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경남 퀴(어라고 하면 뭔지 모를테니)... 성소수자 축제간다.”

“니는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가는데?”

 어머니는 항상 말했다. ‘거짓말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그의 사랑으로 키워낸 진실의 주둥아리가 이렇게 답했다.

 

“나도 그런 거다. 나는 여자도 남자도 다 좋다!”

 

이건 실로 입의 독단적인 행보였기 때문에, 스스로 내뱉고 나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손발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길어지는 정적에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을 떠올리던 중, 돌아온 대답은 다행히 최악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아직 어려서 우정과 사랑을 헷갈리는 거라며, 나중에 커서 다시 생각해 보라는 답을 꺼내놓았다. 식상한 반응에 실망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어쨌든 상황을 모면할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에 어방한 얼굴로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라고 답하며 멈출 줄 모르는 진실의 주둥이를 잠재우던 중 엄마의 충격 고백이 이어졌다.

 

“내도 니 나이 때는 여자 친구가 좋았다.”

 세상에나.....

“대박 엄마도 양성애자인가 보네.”

 여자 좋아하는 건 아빠 닮은 줄 알았는데... 이것도 엄마 유전자였나.

 

2. 

첫 번째 (맞?)커밍아웃은 자고 일어나니 없던 일이 되었다. 엄마는 믿고 싶지 않았고, 나는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기에 서로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은 채 4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당시 최대의 고민은 짝사랑하던 사람을 어떻게 꼬시느냐. 어디 조언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곁의 친구들은 남자를 만나거나, 답 없는 짝사랑만 반복하며 함께 여자 주접이나 떨고 있었다. 나와 닮아 연애에 있어선 영 미덥잖은 친구들을 뒤로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한 사람이 떠올랐다. 긴 구애 끝에 엄마와의 연애와 결혼에 성공하고, 이혼 후에도 종종 여자 친구가 있던 아빠! 는 안타깝게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유골함 앞에 서서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 여자 마음은 여자가 제일 잘 알지!’ 아빠가 전수하지 못한 여자 꼬시기 비법을 파헤치기 위해 한 번도 묻지 않았던 둘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물었다. 그는 추억에 잠겨 첫 만남부터 사내 연애하다 회사에서 쫓겨난 일화, 나름 달달했던 순간들을 술술 풀어놓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니도 니를 좋아해 주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덕담(?)으로 시작된 상담은 기어코 요즘 관심 있는 남자 없냐는 질문을 도출하고 말았다. 한동안 잠잠했던 진실의 주둥이가 움찔거렸다.

 

“나는 여자가 좋다!”

 그래도 나름 두 번째 고백이었기에 서로 당혹스러움이 적었다.

“아직도 남자도 여자도 좋나? 니 진짜 양성애자 뭐 그런 거가?”

“어. (뭐 그런 거라고 말한 지도 오래다)”

“A도 니 그런거 아나?”

“어. (걔한테 처음 커밍아웃했다)”

“B도?”

“어. (걔도 바이다)”

“C도?”

“...어 (걔도...)”

 

디나이얼의 촉인 걸까, 아니면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직감? 몇 없는 친구 중에서 퀴어만 쏙쏙 골라냈다. 여자 꼬시기 비법 얻기는 글렀지만, 게이더 감도 올리기 비법 전수는 직접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을 모아놓고 찬반투표로 딸내미 지지 여부를 결정할 건가? 내게 중요한 건 이거였다.

 

“내가 여자 좋아하면 나 안 사랑할꺼가?” 

“어”

 

단호한 대답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외계행성에서 왔다해도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굴던 그가 겨우 딸이 양성애자라는 이유로 사랑하기를 그만두다니. 의지박약이란 한 달간 헬스장에 5일밖에 나가지 않은 내가 아니라 엄마에게 찰떡궁합인 단어인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영원히 회피하고 싶던 답을 확인한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침대에 누워 삐질삐질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대화를 곱씹다보니 본인도 모르게 발동한 게이더로 턱턱 집어낸 친구들 생각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곧바로 폰을 들어 A~C에게 ‘엄마한테 커밍아웃 한 썰 푼다’라며 한바탕 연락을 돌리고 나니 눈물이 말라 있었다. 사랑 그깟 거? 나도 안 하면 그만 아닌가.

 

 

3.

사랑 안 하기는 개뿔. 의지박약 모녀는 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져버린 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지고 볶으며 애증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렇게 두 번째 커밍아웃도 묻어두고 어영부영 지내던 와중 케세라에 가입했다. 애인을 만들어보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가입한 동아리에서 연애는 무슨, 운영위를 맡게 되면서 일만 주구장창했다. 회의, 집회, 행사의 굴레에 갇혀 매일 같이 밖을 쏘다니자, 엄마가 집 지킴이의 과도한 외출에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했다. 요즘 어디서 뭘 하고 다니냐는 질문에 대충 윤석열과 동기 이름을 대며 둘러대 보려 했지만, 진실의 주둥이는 거짓말에 능하지 못했다. 설상가상, 집회 중 비를 잔뜩 맞은 대형 케세라 깃발을 볕에 말려 둔 날, 엄마가 갑작스레 집에 들이닥쳤다. 독립한 이후 자잘한 무지개 배지나 깃발을 집안 곳곳에 두었는데, 엄마는 그 의미를 몰라서인지, 모르고 싶어서인지 별말을 하지 않았었다. 빨래 건조대를 뒤덮은 초대형 무지개를 본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알고 있었구나?

 

“저건 또 뭐꼬”

“퀴... 성소수자 동아리 들어가서 요즘 거기 맨날 나간다.”

“그럼 거기는 니같은 뭐 성...소수자 그런 사람들만 모여 있는거가?”

“어.”

“그래 뭐 니 친구들도 니 그런거 다 알고 이해해 준다고?”

“어.”

“그럼 우짜겠노 나도 이해해야지.”

 

엄마는 내가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었단다. 친구들이 아느냐고 계속 물어봤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해보면 비건 지향을 시작했을 때의 반응도 비슷했다. 자꾸만 풀떼기만 먹으면 친구들이 싫어한다, 다들 니랑 안 놀고 싶어 할 거라는 둥 걱정인지 속마음인지 모를 말들을 쏟아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답은 같다.

 

“지구상에 인간만 70억이 넘는데, 내가 그런 애들이랑까지 친구 해야되나?”

 (그리고 엄마가 여전히 모르는 건 내가 비건 퀴어라서 만난 친구들이 더 많다.)

 

비건 지향 이후로 친구들 사이에서 은근히 겉돌게 되거나, 큰맘 먹고 한 커밍아웃에 대차게 실패해 혐오 사이퍼를 맞을 때도 가끔 있었다. 그럴 때보다 엄마가 ‘걱정’이랍시고 뱉은 말들이 더 큰 상처가 되었다. 백번 상처 받아도 다시 한번 도전했던 건, 나를 거짓으로 둘러싸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고, 다시 용기 낼 수 있었던 건 그 과정 동안 함께 엄마 뒷담을 해주며 곁에 있어 준 친구들 덕분이다. 끝까지 엄마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더라도 그들이 있어 대충 잘 살아갔을 것이다.

 

아무튼 약 6년에 걸친 3번의 커밍아웃 끝에 그는 대세에 따르기로 했다. 기뻤다. 기쁘긴 한데... 내게도 엄마의 커밍아웃 받아들임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 커밍아웃하던 날, 아니 어쩌면 성적지향을 깨달았던 날부터 엄마를 미워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어려워도, 미워하는 건 쉬웠다. 언젠가 엄마가 나를 두고 떠나거나, 내가 그를 떠나야만 하는 날이 올 때 미움을 키워내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내 마음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나는 여전히 나고 엄마의 마음이 바뀌었을 뿐인데, 우리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나는 숨김없이 말했다. 그간의 묻어두었던 이야기와 미뤄왔던 성소수자 교육(?)을 시작했다. 

 

“퀴어란 말이지, 성소수자랑 같은 말인기라. 원래는 못된 놈들이 ‘쟈들 이상하다’해서 ‘퀴어’라고 했는데, 우리가 ‘뭐 이상하면 우짤낀데’해서 그냥 퀴어가 된거다.

“이야 믓찌네”

 

엄마가 노력하는 만큼 나도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미움을 하나둘 지워나갔고 그만큼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한동안은 거짓말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거라던 엄마의 가르침과 이에 세뇌된 내 입이 참 미웠는데, 그 덕에 썩은 채로 묻혀있던 엄마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커밍아웃하길 참 잘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

‘성소수자’라는 짧은 단어도 어색하게 띄엄띄엄 내뱉던 엄마는 무럭무럭 자라 퀴어, 바이, 커밍아웃, 아웃팅 같은 외래어도 한 번에 알아듣는 앨라이가 되었다. (가끔 ‘그 뭔 팅? 그거 뭐더라’ 하며 묻곤 하지만) 집에 장식된 퀴어 굿즈만 봐도 화가 나 싹 치우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티비에서 성소수자나 관련 뉴스를 보면 들으면 전화로 은근슬쩍 ‘안 그래도 요번에 니 친구들 (성소수자는 다 내 친구로 간주한다) 티비에 나오데’ 하며 소식을 전해주곤 한다. 살다 보면 재정체화도 할 수 있고, 인생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의 커밍아웃은 쉬어가도 될 것 같다. 이 글을 볼지도 모르는 엄마와 친구들에게 감사와 사랑, 그리고 쑥스러우니 못 본척해달라는 부탁을 전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