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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세라 회원 에세이

[회원 에세이] 선생님이 좋아요

by pnuquesera 2026. 1. 9.

작성자:  익명의 선생님 사랑단
감수: 웹진 편집팀
교정 · 편집: 비타

 

선생님이 좋아요[각주:1]

 

 

여성애자[각주:2]들은 왜 이렇게 연상을 좋아할까? 어른스럽고 성숙한 상대한테 깁[각주:3] 받고 싶어서? 깁 받으려는 사람밖에 없어서 우리나라가 부치 부족 국가인가? ... 연상의 수요가 많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이 연상을 짝사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거야 당연히 선생님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연상이니까! 거기다 선생님은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는 연상의 덕목을 빠짐없이 갖췄다. 선생님은 많이 알고 참을성 있게 가르쳐 주고 이끌어준다. 채찍과 당근으로 때로는 엄격하게 혼내지만, 잘하면 칭찬도 해준다. 연상의 여인에게 상냥하게 혼나고 싶나요? 교사 덕질을 하세요. 그렇다. 선생님은 연상의 매력이 극대화된, 연상의 엑기스 같은 존재다. 여성애자들이 선생님에게 미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교사 덕질의 장점

처음부터 교사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평범한 퀴어 오타쿠처럼 2D와 3D를 가리지 않고 덕질했다. 웹툰 캐릭터부터 죽은 왕족까지 두루 섭렵했는데, 하나같이 애정이 반년을 가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 멀리 있어서 애정이 금방 식어버린 것이다. 2차원 속 만화 캐릭터는 물론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아이돌도 화면 속에만 존재하고 닿을 수가 없었다. 혼자 사랑을 시작하고 내가 원할 때 끝내는 방식이 편한 사람은 오타쿠가 되지만, 나는 일방적 사랑이 재미가 없었다. 내가 원한 포지션은 ‘일반인 여자친구’였으니 당연히 일반적인 덕질에 현타가 왔다. 닿으려 할수록 그와 나의 거리만 느껴졌다. 

3년 전, 나름 오래 좋아한 배우 무대인사[각주:4]에 갔을 때였다. 열심히 좌석을 예매하고, 한겨울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영화 시작 전 몇 분가량 얼굴을 봤다. 그는 과연 듣던대로 팬사랑이 대단했다. 짧은 시간에도 앞 좌석의 사람에게 사인을 해주고, 그 많은 사람 한명 한명에게 눈을 맞춰 주었다. 그렇지만 이 팬사랑을 나눠 가지기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수많은 팬들이 열성적으로 어필을 했고 그와는 짧은 눈 맞춤만 남았다. 아...

그에 비해 교사 덕질은 어떤가. 최소 일주일에 2번은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최애[각주:5] 단독 콘서트가 보장된다. 담임 선생님이면 매일 수도 있음. 단둘이 보고 싶다면, 질문을 해서 팬미팅을 하면 된다. 최애의 모든 것을 파악하다 보면 선생님의 과목도 좋아하게 되므로 성적이 오르고 진로가 생긴다. 제일 중요한 건, 선생님을 보고 싶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게 기다려진다는 거다! 매일 등교할 때, 오늘 선생님을 마주칠 수 있을지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난다. 방학에는 선생님을 못 보니 간절히 개학 날을 기다렸었다. 정말 학생들에게 교사 덕질은 추천할 만하다. 이래도 선생님 안 좋아해??

 

 

선생님 덕질의 역사

처음 좋아한 선생님은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다. 나의 초등학생 시절은 막 학생인권 의식이 싹트던 시기였다. 저학년 때는 권위주의적인 선생님에게 눌려 살다 고학년 때쯤 민주화가 됐다. 11살에 전학 오고 처음으로 따스한 선생님을 만나자, 학교에 의지할 만한 누군가가 생겨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이전에는 구호가 안 맞다든지 우유를 남긴다든지, 조금만 규칙을 어겨도 선생님 불호령이 떨어졌으니까. 그분은 이유 없이 화를 내지 않았고 성적으로 학생을 편애하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좋으니 별 관심 없던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됐다. 방과후 교실이 끝나고 선생님과 같이 하교하기 위해 그분의 퇴근을 기다리곤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고는 과학 선생님에게 빠져서 과학에 미쳤었다. 과학 시험을 만점 받으면 그 선생님이 수고했다고 스윗~하게 말해줘서 그걸 들으려 교과서를 달달 외웠다. 그때 과학을 열심히 한 덕분에 문과치고는 과학 상식이 풍부해 선생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고등학생이 되고 나선 본격적으로 선생님 덕질을 했다.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니까 선생님 덕질이 가장 물이 오를 시기였다. 내 최애는 역사 선생님이고 차애는 국어 선생님이었다. 맨날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았는데, 신기하게도 두 분이 수업하면 잠이 오지 않고 또랑또랑해졌다. 뻔질나게 질문하고, 질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찾아가고. 그때 나름 보이겠다고 짜낸 질문들이,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니어서 눈을 질끈 감고 싶어진다... 보충 수업을 듣고 역사 대회를 나가고. 그 결과 수능에서 삼사(한국사, 세계사, 동아시아사)와 국어 1, 2등급을 받았다. 거기서 멈춰서 뒤도 안 돌아보고 학교를 떠났으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처럼 멋진 교사가 되어 학교로 돌아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말았다.

아쉽게도 현역 때 수학 선생님을 덕질하지 않아 수학 점수가 좋지 못했기에 수학 학원에서 재수를 해야 했다. 다행히 수학 학원에는 수학 선생님밖에 없으므로 수학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다. 그때 좋아하던 선생님이 사실 결혼했다는 걸 알고는 얼마나 슬펐는지. 그분에게 너무 힘들다고 푸념하고 위로받는 게 내 재수 생활 한 줄기 빛이었다. 덕질의 일환으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한 덕에 수학도 1등급을 받고 재수를 끝냈다. 마침내 교사 덕질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교사 덕후는 커서 교수 덕질을 한다

그림 1. 나도 무급 조교가 되고 싶다.

 

그림 2. 간증글. 그림 1과 마찬가지로 트위터(현 X)에서 캡쳐함.

 

 

대학에 오고는 ‘촌스럽게 모범생처럼 선생님을 그렇게나 좋아했다고? 이젠 안 그래.’라고 다짐했다. 잘 보이려 했던 엉성한 수작질들이 부끄럽기도 하고, 교생이 돼서 보니 학생이 그저 귀엽기만 할 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번 굳어진 취향은 바뀌지 않는 법. 대학에는 연상의 매력이 더욱 극대화된 교수라는 직업이 있었다. 

일단 교수는 연구가 업이라는 점에서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다. 나보다 세상을 많이 꿰고 있다고 느낀 사람이 사실 그 정도는 아니란 걸 알면 마음이 식는데, 교수의 지식 내공을 따라잡는 것? 쉽지 않다. 그리고 생활 지도의 의무가 있는 교사와 달리, 대학교수는 학생에게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덕후의 정복욕을 자극(...)한다. 로맨스 소설 속 잘난 남주가 ‘날 이렇게 대한 건 니가 처음이야’ 따위의 대사를 날리듯이, 나에게 무관심할수록 차가운 그이의 마음을 얻고 싶어지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교수자는...

이렇게 오래 덕질을 하다 보면 자신의 취향을 알게 된다. 아이돌 덕질의 경우 고양이상을 좋아한다든지, 4차원 같은 엉뚱한 성격을 좋아한다든지. 내가 좋아하는 교수자 유형은 지친 좌파상이었다.

그림 3. 주디스 버틀러 / 그림 4. 한강 / 그림 5. 영지(영화 <벌새>). 모두 '지친 좌파상'

 

 

하 너무 좋네요... 지친 좌파상의 조건은 2가지이다. 이상과 다른 현실에 부딪혀 지쳐 있으나, 그럼에도! 소신을 포기하지 않고 터벅터벅 그만의 길을 가는 꼿꼿함이 있어야 한다. 영화 “벌새”에서 주인공 은희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자신을 동등하게 대하는 교사 영지에게 관심을 느끼고 의지하게 된다. 은희는 이 운동권 한문쌤에게서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발견하고, 미래의 자신에게 투영한 것이다.[각주:6] 은희처럼 내 최애 선생님들도 내가 닮고 싶은 분들이셨다. 앞길을 하나도 알 수 없을 때, 비슷한 사람이 내가 바랐던 모습으로 살고 있으면 그 비결을 캐내고 싶어지니까. 내가 가고 싶지만, 좀처럼 엄두가 안 나는 길을 가는 선생님들을 보면 너무 멋져서 꼬옥 안아드리고파... 



교수 덕질? 그거 어떻게 하는 건가요

교사 덕질은 같은 교사 덕후 친구들이 있고 매일 학교에 나가니까 수월히 할 수 있다. 그런데 교수 덕질은 조금 막막하다. 수업 시간에만 만나서 접점이 없으며 같은 취향의 친구도 찾기 어렵다. 여기선 몸으로 부딪치며 얻은 ‘내향형 한정’ 교수 덕질 꿀팁을 전수하고자 한다. 외향형이면 수업 시간에 리액션 잘하는 것만으로 최애 학생이 될 수 있으니 밑의 고생은 안 해도 된다. 교사/교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학생은 수업 때 대답 잘 해주는 학생이기에...

1단계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학생의 본분을 다하여 눈도장을 찍는 것이다. 수업에 집중하기, 질문하기, 시험 잘 보기 등등. 중고등학교라면 이것만 해도 충분하지만 대학은 쉽지 않다. 교수님의 관심을 끌려면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2단계로 넘어가 먹을 것을 드리며 사적 접촉을 시도해 본다. 새 학기 짝꿍에게 마이쮸를 건네듯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가 보자. 교수님이 내 이름을 외우고, 질문할 때 조금의 스몰톡이 이뤄지면 성공이다. 

그림 6 교수님 길고양이인줄

 

 

3단계는 교수님의 관심사를 공략하는 것이다. 교수님 덕질은 난도가 높은 대신에, 그분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많이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학술 정보 사이트에 검색하면 교수님의 연구물이 줄줄이 뜨니 ‘떡밥’[각주:7])을 열심히 받아먹으면 된다. 아이돌 덕후가 신곡을 기다린다면 교수 덕후는 그분의 새 논문이 나오길 기다린다. 그 뒤 부담스럽지 않게 교수님의 연구 주제를 언급하며 관련 학회, 강연 같은 활동을 다니는 거다. 학계는 좁기 때문에 높은 확률로 교수님을 마주칠 수 있다. 단, 사심이 너무 티 나지 않게, 교수님의 연구 주제에 관심이 있음을 진심을 담아 어필해야 한다. 

 

 

덕질과 짝사랑 사이

앞에서는 선생님(교사, 교수 포함) 덕질이 장점만 있는 것처럼 얘기했으나, 여기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정말로 ‘덕질’만 하는 사람은 상관없지만, 나는 선생님 덕질을 하면서 이게 존경인지 사랑인지 헷갈리곤 했다. 마음이 깊어질수록, 단지 존경하는 마음에서 하는 덕질인지, 정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건지 의문이 생겼다. 헤녀[각주:8] 짝사랑하는 여성애자의 가장 큰 이슈가 우정 대 사랑이라면, 선생님 덕후의 그것은 존경 대 사랑이다. 실제로 인터넷 퀴어 게시판에 올라오는 많은 선생님 짝사랑 글은 ‘이게 존경일까요 사랑일까요’ 유의 고민을 담고 있다. 헤녀 짝사랑에서 사랑과 우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듯[각주:9], 선생님 짝사랑 또한 사랑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이 다 섞여 있다. 굳이 나눠서 구별할 필요가 없음에도 ‘사랑이냐, 존경이냐’ 묻는 이유는, 이 마음이 그냥 존경이었으면 할 정도로 선생님을 좋아하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덕질이면 선생님에게 적당한 반응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나, 짝사랑이면 그에게 받을 수 없는 걸 요구하게 된다. 헤녀 짝사랑하는 퀴어가 ‘내가 남자였으면 너랑 사귀었을 텐데’를 듣고 눈물 흘릴 때, 우리는 ‘oo(이)도 얼른 대학 가서 남친 사귀어야지~ 안 사귄다고? 이런 애들이 꼭 먼저 결혼하더라~’를 듣고 운다. 선생님 짝사랑이 이어질 확률? 거의 없고 설사 이어진다 해도 그럼 안 된다. 선생님은 ‘불가능’이어서 좋은 거니까... 

 

 

그림 7. 고맙다고 하며 거절하는 게 연상의 매력.
그림 8. 여기서 오지콤/아저씨를 ‘선생님’으로 바꿔도 완벽히 대응한다. 이 중 1, 8, 9위를 자주 들었다.

 

 

짝사랑은 힘드니까 최대한 선생님을 덕질한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좋아하려 노력해야 한다. 짝사랑을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선생님은 나를 그만큼 안 좋아하시겠지’ 이런 생각할 시간에 선생님 과목을 더 보는 게 낫다. 짝사랑하는 감정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선생님 덕질은 좋은 성적을 남긴다. 최대한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열심히 공부해보자. 그러면 졸업하고 그 선생님과 적당히 연락하는 좋은 사제지간으로 남을 수 있다. 

 

 

교사 덕질의 행방

대학을 졸업하면 더 이상 만날 선생님이 없는데 나는 누구를 덕질하고 있을까? 반평생 선생님 덕질을 하다 보니, 선생님이 없는 시점은 상상이 잘 안 된다. 아쉽게도 선생님은 덕질하라고 있는 직업이 아니어서 장기적인 덕질이 어렵다. 그래서 졸업 후 내 계획은 첫 번째 대학원에 간다, 두 번째 교사가 되어 동료 교사를 덕질한다, 세 번째 학원 교사를 덕질한다, 정도이다. 선생님 따라 대학원 가는 것은 정말... 아이돌 덕질에 신용카드 빚을 내서 가산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두 번째가 가장 현실적인 방안 같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멋진 중년 선생님이 되어 덕질을 그만둔다면 더 좋고. 

아무튼 당분간은 계속 선생님을 좋아할 것 같다. 내가 선생님을 밝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선생님이 밝은 걸 어떡해... 오늘부터 내 꿈은 교사가 되어서 미중년 부장교사를 만나는 걸로 정했다. “저, 선생님... 저랑 전문적 학습공동체[각주:10] 같이 하실래요..?” (끝)

 

 

 

 

 

 

 

 

주석

  1.  글은 필자가 케세라 소모임 삶을 퀴어링’에서 있었던 오타쿠 발표회(2025년 6 6, 홍예당)에서 발표한 ppt 글로 고쳐  것이다. <편집자 주> [본문으로]
  2. 자신의 정체성에 관계없이 여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을 뜻한다. [본문으로]
  3. 성적인 관계에서 즐거움을 주는 쪽을 ‘깁(give)’이라고 부르나, 최근 여기에 정신적인 보살핌까지 포함해서 ‘깁을 주다’라고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의존적이고 받기만 하는 성향을 부정적으로 묘사할 때 ‘깁줘충(蟲)’이라 쓰는 게 그 예. [본문으로]
  4. 영화 상영 전후로 감독과 출연 배우가 스크린 앞에서 인사를 하고,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홍보 활동. [본문으로]
  5. 덕질하는 상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 [본문으로]
  6. 김원영, ‘붕괴하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이별한다는 것’. “벌새”, 아르테, 2019. [본문으로]
  7. 컴백, 방송 출연 등 아이돌에게서 나오는 새로운 정보. 떡밥을 기반으로 덕질을 하기에 떡밥이 풍성해야 좋다. [본문으로]
  8. 헤테로+여자. 이성애자 여성을 뜻한다.  [본문으로]
  9. 헷갈릴 수밖에 없는, 여성 간의 질척한 우정에 대해선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옐롬, 브라운)”를 보시길. 저도 언젠가 읽을 예정... [본문으로]
  10. 이름은 엄청 있어 보이지만, 그냥 교사들이 하는 세미나. 줄임말은 전학공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