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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세라 회원 에세이

[회원 에세이] 이성애 사회에 보내는 편지

by pnuquesera 2025. 12. 8.

 
작성자: 치즈복어
감수: 웹진 편집팀
교정 · 편집: 비타

 
 
"넌 왜 <이혼숙려캠프>나 <고딩엄빠> 같은 것만 챙겨 보니? 난 화딱지 나서 못 보겠던데." 

"재밌잖아. 저런 사람들도 살아가는데 나라고 못 살 것 없다는 자신감을 준다고 해야 하나?"
 

 

 
인성 논란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진짜 저 이유 때문이다. 나는 막장 관찰 예능의 열혈 애청자다. 회차별로 어떤 빌런이 나오는지 줄줄 꿸 정도로 복습도 했다.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교수라도 되었을지도…? 대동여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내가 이토록 남의 연애와 결혼 생활, 그것도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내가 이 이성애 사회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이방인, 바이섹슈얼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거친세상에뛰어든건저지만쫌힘드네요^^ 이미지

 
 
나는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둘 모두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런 내 눈에 이성애라는 규칙은 기이한 농담 같다. 남자와 여자 둘 다 똑같은 사람인데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왜 저렇게 안달내고 지지고 볶는 걸까? 
 
이성애자들 사이에서는 무한히 반복되는 논쟁이 있다. '남사친/여사친' 문제나 '깻잎 논쟁', '새우 까주기' 같은 것들. 내 친구가 새우를 못 까고 낑낑대면 "나이 먹고 저런 거도 못하는구나..." 싶어 측은지심에 까줄 것 같은데, 이성애자 커플들은 이게 이별 사유가 된다. 이성애 연애 고민 상담을 요청해 오는 친구들에게 나는 사회생활을 한답시고 공감하는 척한다. 음 그랬구나, 속상했겠구나. 이 두 마디만 돌려서 공감해 준다. 어짜피 상담하러 온 친구들도 답정너[각주:1] 이고 자기 감정을 버리려고 온 걸 알기에 대충 해준다. 그치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을 한다. 지구의 반지름은 약 6,300km. 총인구는 약 80억. 이렇게 넓고 사람 많은 지구에서 안 맞으면 빨리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굳이 그 시간과 돈, 감정을 쓰면서 만나는 이유가 대체 뭘까?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오늘도 쫓겨나지 않기 위해 귀여운 표정 지으며 버티고 있지만, 솔직히 나는 그들이 이해 가지 않는다. 그들, 이성애자의 사회는 한창 때의 성인 남녀가 연애를 하지 않으면 어디 하자가 있거나 비정상인 것처럼 생각한다. 
 
 

(좌) 남친 말로는 너무너무 손이 시려서 후배랑 손잡고있었다는대 그냥 믿을까?? 이미지, (우) 쫓겨나지 않도록 노력하자. 귀여운 표정을 많이 짓고 실수하지 말아야 해.

 
 
 
현실의 연애도 이해가 안 가는데, TV 프로그램 속 세상은 더하다. <고딩엄빠>나 <이혼숙려캠프>를 보면 폭언과 폭력이 난무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헤어지지 않는다. 나 죽고 너 죽자하면서도 결국에는 다시 같이 산다. 나는 항상 TV를 보며 생각한다. "왜 남들이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자기 인생을 꼬아? 왜 폭력을 쓰는데도 못 헤어져? 그냥 헤어지면 되잖아." “왜 자기 인생을 자기가 못 결정하지?”
 

 
나에게 삶은 통제 가능한 것이어야 했다. 뭐든 내 생각대로 되어야 했다. 중학생 때는 전교 한 자릿수 찍고 싶어 커피와 수면제를 밥 먹듯 먹었고(결국 전교 9등 찍음), 고2 때는 대학교 가고 싶어 삭발하고 크리스마스, 새해, 설날 등 빨간 날에도 등교했다. 그렇게 원하는 대학에 가서도 새벽 6시 수영부터 밤 11시 도서관까지 틈을 주지 않고 살았다. 친구들은 무리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빈틈을 보이는 그 시간들이 아까웠다. 어쩌다 낮잠이라도 자면 뒤쳐진다는 생각에 죄를 짓는 거 같았다. 그 결과 (4.5 기준) 4.43 학점과 정신병을 얻었다. 나는 내가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을 끝내면서 거기에 맞는 성취감을 얻으며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도 않은 감정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저들이 한심해 보일 수밖에.
 

약한 나는 부모님도 원치 않고, 나라도 원치 않는다. 이미지

 
그런데 문득 남들이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하는 사람들. 가만 보니 그게 꼭 TV 속 남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남자랑 사귀면 될 텐데 굳이 여자에게 설레는 나, 남들이 다들 적당히 하라는데 몸을 갈아 넣어 4.43을 받고 정신병에 빠진 나. 나 역시 사회적 시선, 말들 따위는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돌진하며 살지 않았던가? 
 

 
결국 우리 모두는 논리적으로만 살 수 없다. 이성애자나 퀴어나, 사랑에 미친 사람이나 성취에 미친 사람이나. 주토피아의 닉이 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뀔 수 없는 게 있어."

그들에게 그게 끊어낼 수 없는 사랑의 굴레라면, 나에겐 내 존재의 증명과 성취감이 그렇다.
 

해질녘 지붕 위에서 웃고 있는 도로로 이미지

 
올해 여름, 침대 밖으로 나올 힘조차 없어져 효원 상담원에 방문했다. 상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치즈복어씨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잘 안 주네요. 제가 물어보는 거에만 대답을 해요. 너무 방어적이에요." 맞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게 귀찮고 싫다. 나도 잘 모르는데 그걸 어찌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할까. 그래서 나는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대신, TV 속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걸 택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이성애자들의 그 복잡하고 요란한 연애를 100% 이해하지 못한다. 왜 폭력을 참는지, 왜 깻잎에 화를 내는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나 그들이나, 각자의 방식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번 주에 밥 먹을 때도 <이혼숙려캠프>를 틀 것이다. "쟤네 진짜 왜 저래?"라고 욕하면서도, 결국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인생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묘한 위로를 얻기 위해서. (끝)
 
 

 
 
주석

  1.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준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