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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세라 회원 에세이

[회원 에세이] 세상을 떠 버리는 그날까지

by pnuquesera 2026. 2. 10.

작성: 곰곰
감수: 웹진 편집팀
최종 편집: 은

 

 

뜨개… 좋아하세요? 

 

이것저것 즐기는 취미는 많지만, 밖에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무난한 취미를 꼽으라 하면 나는 단연 뜨개를 꼽을 것이다. 그렇다면 곰곰은 왜 하필이면 밖에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무난한 취미로 뜨개를 잡았을까. 뜨개를 하면 도당체 어디에 좋을까. 그리고 어떤 걸 만들 수 있을까. 이래 보여도 뜨개바늘을 잡은 기간이 제법 긴데, 그간의 이야기 타래를 조금 풀어보려 한다.

 

 

xxx첫뜨개기억xxx

초등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개금동 할머니 댁에 놀러 갔더니 사촌 언니들이 나랑은 안 놀아주고 자기들끼리 뜨개질을 하고 있더라. 할머니 댁에 놀러 갈 때마다 항상 언니 좋아 나랑 놀아 상태였던 나는 내가 소외되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했고, 언니들이 하는 중인 무언가에 너무나도 끼고 싶었던 나머지 그까짓 거 나도 할 거라면서 어떻게 하는지 알려달라고 할머니를 졸랐다. 하지만 만 6세의 인지발달은 실 사이에 바늘을 찌르고 실을 끌어다 엮어서 편물을 짜내는 로직을 이해하는 데에 도달하지 못했고(안타깝지요), 결국 잉 모르겠어염 하고 내팽개치고선 놀이터에 나가 탱자탱자 뛰어놀았다. 이게 나의 첫 뜨개 기억이다.

*

시작이 이렇다 보니, 나에게 있어 뜨개는 할머니가 내게 남기고 간 흔적 중 하나다. 그 몇 가지 흔적 중 나한테 남아있는 줄도 모르다가 최근에서야 알아차린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대바늘 코 잡는 방법이다. 뜨개를 하고자 한다면 무조건 코를 잡고 시작해야만 한다. 코를 잡는다는 건 편물의 기초공사이자 토대 다지기이자 바닥공사에 해당하는 과정인데, 보통 대바늘로 코를 잡는 영상을 찾아보면 실을 왼손에, 바늘을 오른손에 쥐고 시작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인 뜨개 코잡기

 

그런데 나는 몰랐지, 할머니가 가르쳐 준 방식이 오른손 왼손이 반대일 줄은! 그런 탓에 나는 항상 실을 오른손에 감고 바늘을 왼손에 쥐고서 코를 잡는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 뜨개는 항상 코잡기부터 시작해야 하기에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각주:1] 를 시작할 때마다 매번 할머니를 떠올리며 코를 잡는다.

할머니 보고 싶다!

 

 

xxx뜨개의 효능xxx

뜨개를 하면요, 피톤치드가 나와서 두통이 싸악 없어지고요, 척추도 쫙쫙 펴지고요, 시력도 교정되고요, 충치도 안 생기고요, 아무튼 일신이 건강하니 집구석에 평안이 깃들어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어쩌구…

…그랬으면 참 좋았겠으나^_ㅠ

 

얼렁뚱땅 일상에 스며든 뜨개는 내 인생에 제법 도움이 됐다. 사실은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해서 실질적 도움은 전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뜨개를 하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을 적어볼까 한다.

 

*

잡생각 없이 하나에 집중하게 됨 → 정병 해소에 도움이 된다(아마도)

사실 뜨개 작품은 끝없는 반복 작업(혹은 노동)의 산물이다. 단순한 작품을 뜨든, 복잡한 기법이 들어간 작품을 뜨든, 어쨌든 한 코씩 뜨기를 반복해야만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단순한 반복 작업은 잡생각 없이 멍 때리며 눈앞의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반면 복잡한 반복 작업은 잡생각이 끼어들 틈조차 없애준다. 그리고 그 반복 작업들이 충분히 쌓이고 나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결과물이 생긴다. 잡생각도 날리고 성취감도 얻을 수 있다. 오오 뜨개의 효능이시여…

 

실제로 몇 년 전, (중략..^^) 때문에 ‘내가 정병에게로 간다’를 넘어 ‘내가 정병 그 자체가 된다’ 상태였을 때, 뜨개는 훌륭한 도피처이자 쉼터가 되어주었다.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모든 생각이 (…^~^)로 연결되는 미친 상황 속에서 뜨개는 당시 사람 꼴로 다니지 못했던 곰곰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셀프한처먹기쇼를 잠시나마 멈추고 당장 눈앞의 반복 작업에 몰두하게끔 만들었다. 뜨개의 효과는 굉장했다!!

 

*

실수를 발견했을 땐 되돌아가면 된다.

 

“푸르시오”라는 말이 있다. 편물 생겨먹은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혹은 신나게 바늘을 움직이다가 과거의 내가 남겼던 치명적인 실수를 발견할 경우. 그 부분만 똑 떼어서 수선하는 방법은 없다. 정직하게 지금까지 뜬 편물을 실수한 부분까지 풀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방법뿐이다. 그렇기에 푸르시오는 이제 그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인 후 행동으로 옮기라는 의미에서 건네는 예사높임 명령문이다.

 

반면 실수를 안고(혹은 무시하고) 그대로 진행하는 방법도 있다. 이러면 내 눈에 미친 듯이 거슬리던 실수가 남들 눈에는 티 하나도 안 나는 사소한 티끌에 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고, 어떻게든 수습할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다.

 

*

이렇게 좋은 뜨개!

제발 같이 해 주십시오….

뜨개의 효능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는데, 사실 이건 부가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숨겨왔던 곰곰의 진짜 욕망 지금 바로 무료공개합니다

1. 뜨개 실이랑 뜨개 용품 공구해요 ^____^

2. 같이 뜨개 얘기 할 뜨친[각주:2]이 필요합니다.

3. 케세라 굿즈 같이 만들 사람이 있으면 참 조켄네^^

이상입니다.

 

xxx자랑xxx

내가 뜨개바늘을 쥐게 된 역사와 뜨개의 효능에 대해 구구절절 풀어놓았으니, 이제는 그 결과물들을 주섬주섬 늘어놓아 볼 차례다.

(최근에 뜬 것 중에서 재밌게 떴고, 또 특히 애정이 가는 것들을 추렸다.)

 

1. 뜨개 슬로건ㅋㅋ(탄핵하라/체포하라)

 

이것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2024 겨울, 너나 없이 모두가 집회뺑이를 치던 계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2월 첫째 주 주말, 친구와 서면 광장에 같이 나가기로 약속하고는 쩌어기 윗지방과 비교하면 따뜻하기 그지없지만 그렇게 방심한 틈새를 파고드는 부산의 겨울바람을 견디기 위해 준비하던 곰곰. 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무언가를 들고나가고 싶은데 마땅한 게 없어 고민하던 찰나,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 아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슬로건 좋지
종이에다가 그냥 쓰면 도파민이 돌지 않는다(=만드는과정이재미없으면만드는가치가없다)
콘서트에서 패브릭 슬로건 같은 나눔하지 않나?
뜨개 편물도 패브릭이다
배색뜨개슬로건만들기너무재밌겠다(흥분)

그래서 뭐… 하룻밤 새에 패턴 찍고 코 잡고 무작정 떴다. 너무너무 재밌었다(뜨게 된 경위는 너무너무 재미없었지만).

재미: ★★★★★(+간절함)
한줄평: 다시는!! 이거 들고 뛰쳐나갈 일이 없게 다오(제발)

 

2. 뜨개장미~~

시작은 친구(은님) 졸업식 선물이었다. 졸업한다길래 척수반사로 꽃다발 사 가야겠다~ 했더니 집에 반려동물이 있으니 꽃은 사 오지 않아도 된다더라. 그리고 나는 그걸 생화만 아니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럼 뭐… 뜨개 꽃 떠줘야지…. 이게 작년 2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케세라에서도 여성의 날을 기념해서 뭔가 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이 학교와 광장에서 여성 참정권을 의미하는 장미를 나눔 하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는 다시 나는 뜨개로 장미를 만들 줄 알고 채원은 종이 접기로 장미를 만들 줄 아니까 우리 함께 장미를 만들어 학교와 광장에서 나눔하자! 라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와!!).

 

재미: ★★★★★
한줄평: 이제 감고 장미 있을 같아요 쩔죠

 

3. 프라이드 뜰래그

(2025 부산퀴어문화축제에서 야심 차게 선보인 케세라의 후원리워드 프라이드 뜰래그)

25년도 하반기, 모 명품 브랜드의 작은 굿즈가 뜨개 커뮤니티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positive일까요 negertive일까요). 옷핀에 짧은뜨기 몇 코를 뜨고 명품 로고가 새겨진 작은 챰을 달아놓은 째깐한 브로치가 매우 놀라운 가격을 달고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뜨개 작품이라는 것이 매우 노동집약적인 공예품이긴 한데….

아무튼, 여기에서 착안하여 옷핀에 뜨개를 해서 프라이드 플래그를 달아보자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튀어나왔고, 그 결과 <프라이드 뜰래그>가 나오게 되었다. 부퀴 부스를 준비할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던 탓에 목표한 수량을 다 만들 수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수량 책정 건에서 폭주했던 나를 뜯어말려 준 삼사 진토와 부스 준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신 부원분들이 있어 문제없이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뜰래그 제작에 큰 도움을 주셨던 부원 분들께 너무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전합니다,,, 다음에 또 같이 만들어요 ^_____^

재미: ★★★★★
한줄평: 귀엽고 만들기도 쉽다!

 

4. 뜨개 어금니

여태껏 살면서 사랑니 관련 걱정? 고민?은 단 한 쪼가리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신년맞이 스케일링 보험적용 받으러 방문한 치과에서 ‘님 사랑니 매복인데 뿌리가 신경이랑 가까워서 위험하셈’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타이밍은 또 어찌나 기가 막히는지 그 말을 들은 다음 날 저녁부터 왼쪽 아래 어금니 부근이 욱씬거리기 시작하더라. 두려움에 떨던 나는 내 손으로 저것을 당장 뽑아 치워 버릴 능력이 되지 않으니, 뜨개질로 떠 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새벽 2시 30분경의 일이었다. 재밌는 일이 새벽에 일어나는 걸까, 아니면 새벽에 하는 일이 재미있는 걸까. 아무튼 아닌 밤중에 어금니 뜨기는 참 재미있었다.

+너무 무서운 사실: 사랑니 발치 진행률 25%… 이걸 세 번이나 더 하라고?!

재미: ★★★★★
한줄평: 뜨개 어금니 도안 필요하시면 곰곰에게 연락 주십시오

 

 

***나가며***

            뜨개... 뜨개 하나?

뜨개...

         뜨개 진짜 재밌는데

(수동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위에서 재미 별점을 매길 때 모두 5점★★★★★으로 책정했다. 아 뜨개 진짜 재밌는데... 재밌는 거 같이 하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

그동안 케세라에서 계속 공수표만 날리고 실체화를 못 하던 계획이 하나 있다. 케세라 뜨개 소모임을 만들고 함께 모여서 뜨개질을 하는… 그런 계획…. 구상만 실컷 해 놓고 이런저런 사정 또는 핑계로 미뤄왔었는데, 이제 드디어 이 과거를 청산하고 공수표를 회수하게 되었다. 우리 소모임 정상영업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곰곰에게 연락 주세요.

 

*

사실 뜨개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뭐든지 뜰 수 있다. 해외 뜨개 도안 사이트인 Ravelry를 뒤져보면, 세상 곳곳에 퍼져있는 뜨개에 미친 사람들이 뜨개로 온갖 것을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스웨터나 모자, 자켓같은 의류는 물론 커튼도 뜨고 테이블보도 뜨고 자동차 시트 커버도 뜨고 빤쓰도 뜨고 아니 미친 세상에 뜨개로 콘돔(심지어 무지개) 만들어 놓은 사람도 본 적 있다. 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슈.

다시 말하지만, 뜨개는 뭐든 새로 만들 수 있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풀어버리고 또다시 뜨면 되는 일이다. 뭐든 만들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뜨개. 정말 최고 아닌가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뜨개합시다.

 

세상을 떠 버리는 그날까지!

 

 

 


주석

  1. 뜨개인들은 보통 뜨는 중인 편물을 ‘프로젝트’, 완성한 편물을 ‘작품’이라 칭한다. 근데 섞어서 쓰기도 한다.  [본문으로]
  2. 뜨개친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