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비타
인터뷰이: 닭살튀김
일시: 2026. 03. 08 19:00-20:50
장소: 온라인 줌미팅
"기록중독자" 시리즈 1
| 시작은 우연이었다. 작년 말부터 팟캐스트 퀴어방송을 1화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최신화부터 들을 수도 있었지만, 그땐 처음부터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인과 퀴어방송의 재밌었던 에피소드에 대해 얘기하면서 게스트로 나왔던 닭살튀김 님을 처음 알게 됐다. 11년 전, 부산의 성소수자 동아리 QIP에서 회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고 호기심이 생겼다. 두 달 동안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SNS 계정에 연락해서 인터뷰 요청을 드렸고, 흔쾌히 응해주셨다. QIP는 Queer In Pusan의 줄임말로 2014년 3월 부산대학교에서 발족된 성소수자 동아리다. 부산대학교 동아리에서 시작했지만, 활동 영역이 커져 부산 전체를 아우르는 성소수자 단체로 성장하였다. (이후 2017년 3월 부산대학교 학내 성소수자 동아리 케세라가 발족되었다.) 현재 우리는 졸업생들과 잘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시기의 단절이 컸고, 지방 대학이라는 특성상 졸업과 함께 취업을 위해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들이 현재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이 단절을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생애 주기의 일부인 걸까? 나는 졸업생들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최근에 활동했던 졸업생부터 순서대로 연락해볼까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먼저 닿아보는 것으로 방법을 선회했다. 이 인터뷰가 그 첫 번째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은 사라진다. 11년 전 부산에서 회지를 만들었던 닭살튀김 님이 지금 이 인터뷰에 응해준 것도, 어쩌면 그 기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 지면을 통해 인터뷰를 할 예정이다. 회지를 만들었던 사람일 수도 있고, 행사를 기획했을 수도 있고, 그냥 사는 사람일 수도 있다. 지금은 다른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기록하고 싶다. |

오프닝 — 안녕하세요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안녕하세요. 닭살튀김이라고 합니다. 부산에서 동아대학교를 다녔고, 2014년에서 2015년 사이에 QIP 활동을 했습니다. 2015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수원을 거쳐 용인에서 살고 있고요. 지금은 조용히 직장 생활하고 있습니다.
1부 — QIP에서의 시간
Q. QIP에 처음 가입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처음에는 제가 다녔던 동아대 안에서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잘 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트위터를 통해서 마침 QIP에서 공개 설명회가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어요. 그 모임에 찾아가서 가입을 하게 됐어요. 원래는 트위터에서 사람들과 많이 교류를 했는데, 트위터에서 친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 혹은 수도권에 살았어요. 저와 가까운 곳에서 비슷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어요. QIP에 가입했을 당시에 마침 학과도 바뀌는 시점이었고, 제가 낯을 가려서 학교에서 친한 사람도 많이 없어지니까 [QIP라는 자리에 들어가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편안함과 안도감이 들었어요.
Q. 어떤 장소에서 주로 모였고, 동아리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주로 대학교 강의실을 빌려서 모임을 했어요. 처음 제가 가입했을 당시에는 QIP 구성원이 15명 정도 였는데 점점 더 늘어났어요. 모임 후에 뒤풀이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 사장님이 이쪽 게이 커플이셨던게 기억이 나요. 가게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고 저희는 대학 동아리가 아니고 부산의 모임이다 보니 서면의 대관 장소에서 모이기도 했어요.
기억나는 활동으로는 학내 대자보 붙이기, 퀴어 영화제 개최, 서울 인권 행사 같이 가기 등이 있었어요. 길원평 교수가 아직 [학교에] 있나요? 그분이 썼던 대자보에 대한 반박 대자보를 썼던 기억이 있고요. 저희가 썼던 대자보나 현수막이 훼손되면 함께 대응했어요.
같이 모여서 놀 수 있는 행사도 좀 많이 했었는데 연말에는 파티를 하거나 할로윈에 드랙 파티를 열기도 했어요. 경북대 퀴반스랑 MT를 함께 가기도 했고요. 요새는 술자리가 많이 없죠? 당시에 저희도 술 마시는 사람, 안 마시는 사람 나뉘어서 모이기도 했어요. 카페에서 모일 사람은 모이고, 술집에서 모일 사람 모이고… 성소수자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들, 연애 얘기, 헤어지고 나서 생긴 사건들… 그런 것들도 많이 기억에 남아요.
Q. 퀴어 영화제를 기획했다니, 대단한데요. 어떻게 하셨나요?
크게 어렵진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희가 자체적으로 파일을 구하거나 감독님에게 요청해서 파일을 받았고, 그 다음에 부산대 강당에서 프로젝터로 영화를 사용했고요.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SNS 통해서 많이 와달라고 얘기하면서 홍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첫해에는 시작하는 단계라서 그렇게 막 거창하게 뭘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네요. 기획도 작게 홍보도 작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Q. QIP 활동 중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저는 독서 토론을 했던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무지개 속의 적색』 으로 독서토론을 했던 기억이 있고, 그리고 발표 주제를 정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도 했어요. 저도 <스톤월 항쟁과 새 운동의 탄생>으로 2014년 11월 28일에 발제를 맡았어요. 생각보다 뭘 많이 했네요.
—학술적인 활동을 많이 하셨네요.
그렇죠, 그냥 모여서 술 마시는 그런 모임은 아니었고요. 한 달에 두 번 정도 정기적으로 모여서 회의 같은 걸 했고, 회의록을 작성해서 다음에 뭘 발표할지 같이 얘기하고요. 이런 활동들이 서로 결속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물론 모두가 회의에 참가했던 건 아니고 뒷풀이 자리에만 오는 회원들도 많았어요.
저는 QIP가 인권 모임이라서 좋았어요. 인터넷에서만 떠드는 것보다는 실제로 활동에 참여하는 게 훨씬 가시적이고 효과가 있고 보람도 있고 뿌듯하고 그렇잖아요. 그때는 정말 그렇게 느꼈어요. 당시에는 제가 학생이라서 할 수 있었던 활동이고 지금은 현실의 벽이 좀 크다 보니까 좀 힘들죠. 학생이다 보니까 할 수 있었던 그런 경험들 다 소중하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Q. 독서 토론을 인상적이라고 생각하신 이유를 더 듣고싶습니다.
일단은 제가 [독서모임을] 안 했으면은 아예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겠죠. 저희가 게이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레즈비언들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다 같이 읽어보고 연대하고 이런 게 참 중요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 때문에 저희가 더 결속을 할 수 있었던 거겠죠. 보통 성소수자 동아리들이 내부 의견 차이로 안 좋게 해산되는 경우를 몇 번 봤는데, QIP는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잘 모르겠지만 학술 활동을 해서 그런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2부로 넘어가도 될까요?
잠시만요. 가장 선명했던 순간에 대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동아리에서 제가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까봐 항상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해요. 나중에는 안 좋게 헤어졌는데요. 성소수자로서 좋아하는 감정 자체가 오히려 불안의 원천이었던 것 같아요. QIP라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꼈던것 같아요. 연애를 하고 싶어서 [동아리에] 들어간 건 아닌데 사람끼리 얽히다 보면 그랬던 거죠. 일단 뭐 그렇습니다.
2부 — 회지를 만드는 일

Q. 회지는 어쩌다 만들게 되셨나요? 처음 기획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당시에 다른 대학 성소수자 동아리에서도 간행물을 내더라고요. 일단 서울대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내는 간행물의 영향도 받았고요. 읽었는데 내용이 좋더라고요. 다른 동아리도 하는 간행물 '우리도 이런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에 회비도 충분히 있어서 제작비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겠다 싶었어요. 무엇보다 회원들 사이에서 뭔가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모임에서 의견을 냈을 때 반응이 좋았고,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처음이니까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추천사가 세편이나 수록되어 있더라구요.
예나 지금이나 트위터로 사람들하고 연결이 많이 되어있었고, 트위터를 통해서 많이 요청하고 글도 받았어요.
Q. 제작 과정에서 특별히 도움을 받은 분들이 계신가요?
파도 형이 정말 없어서는 안 될 분이었어요. 당시 연세대 성소수자 동아리 컴투게더에서 교환학생으로 부산대에 와 계셨는데,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겸해서 디자인을 맡아주셨어요. 사실 회지 제작은 팀이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첫 기획 회의 때부터 방향 설정에 대한 갈등이 생겨버리니 사람을 모아서 하기가 좀 부담스럽고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파도 형이랑 둘이서 주로 작업했어요. 엿킹 님이 보조적으로 도움을 주시기도 했고요.
Q. 회지를 만들면서 힘들었던 부분은 어디였나요?
필진에게 [원고] 마감 요청 독촉이 쉽지 않았어요. 어떤 글이든 좋으니 써주면 된다, 주제는 자유라고 했는데 중간에 못하겠다고 미안하다고 한 사람도 있었어요. 다행히 글을 완성한 회원들이 있어서 마무리를 할 수가 있었죠. 받아왔던 원고들 날 것 그대로도 좋았는데 제가 국어국문학과였다 보니 완벽하게 글을 다듬어가야겠다는 열정으로 2~3번씩 검토하면서 밤샌 적이 있어요.
지금 아쉬운 건, 회지에서 빼게 된 글이 1~2개 있어요. 지금 생각해서 보면 글을 실었어야 했던 것 같아요. 빼는 과정에서 관계가 단절되었어요. 그건 진짜 잊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마지막 인쇄 단계에서 페이지 오류가 났는데, 마침 디자인을 담당하는 파도 형이 해외로 나가 비행기에 타고 있어서, 트위터 지인들에게 SOS를 해서 겨우겨우 해결했는데 그때 좀 많이 아찔했어요.
Q. 완성된 회지에 대한 첫 반응이 궁금합니다.
런칭 파티를 열었는데 전인 님이 기타를 연주해주셨던 게 기억에 남아요. 정확히 몇 부를 발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 300부 정도 만들었는데, 부산대학교 신문 꽂는 곳에도 배포하고, 동아대 인문대 신문 꽂는 곳에도 배포하고, 이태원에 있는 성소수자 전문 서점 '햇빛'에도1 10권 넘게 보냈어요. 퀴어 아카이브락에도 기증했고요. (비타: 혹시 비매품이었나요?) 네 비매품이었어요. 저는 학교 교수님들께 드리기도 했는데 그게 일종의 간접적 커밍아웃이기도 했죠.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이 특정 글을 언급하며 피드백 주신 경우도 있었고요. 이런 글을 알릴 수 있어서 좋다는 반응이었어요. 필진 중에 부산대 학생뿐 아니라 직장인, 그리고 [QIP] 외부 기고자도 있었는데, 그래서 더 다양한 위치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기억에 남는 반응은 엿킹 님이 쓴 글이 되게 꽤 많이 반응이 좋았어요. 2 제목이 <어린이 청소년 성소수자로서의 경험들>인데 개인적이면서 감각적으로, 그리고 과감하게 글을 잘 쓰셨어요.

그 다음에 QR 코드가 [실물] 간행물에 있어요. 그건 파도 형이 낸 아이디어인데 노래 인터뷰에 실려 있어요. 제가 그때 좀 부정적으로 반응을 했었는데요. 지금은 카메라로 QR 코드를 되게 많아도 주소가 뜨잖아요? 근데 그때는 어플을 따로 깔았어야 됐어요. 제가 앞날을 보지 못해서 그렇게 반응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회지 제목에 대해서는 안물어보시나요?
Q. 제목 e² 는 어떻게 정해졌나요? 여러 후보가 있었을 것 같아요.
제목 후보가 몇 가지 있었어요. 초기 기획회의에서 동남 방언 중 하나를 하자고 했어요. 그때 유력한 후보 중 하나가 '솔찌' 였어요. 저는 전남 순천에서 와서 동남 방언에 익숙치 않다보니 회원들 의견을 받았어요. 한 회원이 e²를 제안했는데, 서울에서는 이게 같은 발음인데 경상도 지역 화자들은 숫자 '2'와 어미 'e'를 다른 음으로 발음하잖아요. 그런 중의적인 언어적 특성을 제목에 담아서, 이성애 중심 사회 속에서 같지만 '다른' 성소수자의 목소리. 제목 하나에 지역성과 정치성이 동시에 담긴거죠.
Q. 회지 제작에 대해 다른 비하인드가 있을까요?
표지 사진을 찍으려고 영도대교 도개 시간에 찾아갔던 기억이 나요. OO형이라고 그 형이랑 같이 사진 찍었는데 그 사진은 채택이 안 됐죠.
3부 — 졸업 후, 지금
Q. 졸업하고 타지로 오신 뒤, 성소수자 커뮤니티와는 어떻게 연결되어 계세요?
졸업 직후에는 서울에 있는 행사도 좀 가고 이랬는데 이제 몇 년 지나고 난 뒤에는 퀴어 커뮤니티와 많이 유리됐어요, SNS도 많이 줄였고. 생계 문제 같은 현실의 벽이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이게 또 내가 먼저 들어가지 않는 이상 영원히 교류를 안 하게 될 수도 있거든요. 근데 또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서 또 다시 교류를 하고 싶다는 마음도 생기기도 해요.
되돌아보면, QIP가 오래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대학생뿐 아니라 직장인, 졸업생 같은 다양한 구성원을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Q. 회지를 제작한지 10년이 지났는데 지금 소회가 어때요?
일단 이렇게 연락이 올 줄 몰랐어요. 간행물 관련해서 연락이 왔던 건 2020년에 '대학 성소수자 출판물 아카이브 인터뷰'를 했었어요. 5년 내 출간된 성소수자 동아리 회지들을 아카이빙하는 작업이었는데, 줌으로 다른 동아리 간행물 편집자들이랑 모이게 됐어요.그리고 [2026년] 오늘 이렇게 또 연락받았고요. 그래서 이렇게 남겨놔야 됩니다. 이렇게 남겨놔야 10년 후에 또 누군가가 보고 연락을 하고 나도 만들어 봐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그러지 않을까요?
Q. 지금의 웹진 편집부에게, 회지를 처음 만들어봤던 사람으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일단 만드는 게 중요해요. 처음이면 어설퍼도 용서가 되거든요. 발로 뛰세요. 동아리 안에 출판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한 명은 있을 거예요. 온라인에서 찾아봐도 되고요. 만드는 속도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아두고, 주변에 SOS를 많이 하세요.
나가며—
Q. QIP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닭살튀김님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그때 동아리 활동했던 게 대학 시절에서 이제 가장 잘했던 일인 것 같아요. 그걸 안 했으면은 안 좋았던 기억밖에 없었을걸요. 무미 건조하게 학교 다니다가 끝났을 것 같아요. 동아리에서 연애도 해보고, 돌이켜보면 나쁘지 않았네요.
—오늘 인터뷰 응해줘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도 파이팅 하시고, 감사합니다.
각주
- 지금은 문을 닫았다. https://slownews.kr/45595 [본문으로]
- '엿킹'이 기고한 글 https://blog.naver.com/square_of_e/2206346932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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